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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Dec 17. 2021

미워도 다시 한번, 겨울의 폴란드

아무튼 폴란드와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다. 중부 유럽의 숨은 보석이라는데 그것도 빛이 있어야 보이지 천지 분간도 안 되는 어둑한 날씨와 사방에 낀 안개는 설사 그곳에 다이아몬드가 있다 한들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좋은 계절 다 보내고 하필 이 계절에 다시 올게 뭐람. 몇 년 전처럼 꼭 이맘때, 동지를 앞두고 있어 낮이 가장 짧은 시기이다.


바르샤바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 2021.이루나.all rights reserved


비행기를 타던 날 유독 마드리드 날씨가 좋았다. 무려 영상 17도. 12월의 날씨라기보다는 봄날의 그것처럼 포근하고 맑았다. 비행기를 타며 바르샤바의 날씨를 검색해보니 그 낮에 이미 영하 1도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폴란드 겨울은 일교차가 거의 없다. 하루 종일 그냥 0도 근처를 머물렀다. 지난밤 단단히 챙겨 가려 옷장을 뒤졌지만 가지고 있는 옷과 신발은 모두 마드리드의 겨울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들 뿐이었다. 뭘 가져 가든 추울 것 같아 굳이 챙겨 가지 않기로 했다.


'추우면 가서 하나 사지 뭐'


이런 쉬운 해결책 하나와 그래도 이 몸이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겨울이 있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생뚱맞은 믿음을 가지고 비행기를 탔다. 오후 7시 반에 도착한 바르샤바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겨울이면 오후 3시 반에 해가 지는 곳이니 이미 해가 지고도 4시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니 어쩐지 오후 7시 반이 아니라 자정에 가까운 공기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겨울에 다시 폴란드를 오기 싫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몇 년 전, 처음 만났던 겨울의 폴란드에 대한 기억은 겨우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7시반 바르샤바의 하늘 © 2021.이루나.all rights reserved


그 겨울 폴란드에 대한 기억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황당함'이었다. 겨울에는 해가 워낙 짧은 데다가 흐린 날이 많아서 아침이 되어도 잠시 '안 어두워졌다가' 오후 3시가 넘으면 다시 밤이 되었다. 그렇게 낮을 건너뛰고 다시 밤이 되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가족을 만나러 오는 게 아니었다면 절대 자의로는 오지 않았을 나라다. 적어도 이 겨울에는 말이다.


도착해보니 역시는 역시나였지만 그래도 두 번째 보는 폴란드의 겨울이라고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태연히 차의 뒷좌석에 앉아 바르샤바 한식당 표 김밥을 우걱우걱 먹으며 폴란드 고속도로 풍경을 보았다. 아니 사실 아무것도 보진 못했다. 안개가 자욱했고 밤이었고 무엇보다 폴란드의 겨울이었으니까.


고작 2주 있을 거면서 집에 비타민D가 있느냐, 해가 안 뜨는데 비타민D 챙겨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없으면 약국에 사러 가야겠다 난리 부루스를 치며 밖에 나가니 역시나 눈 세상이다. 이것도 예상했던 일이라 이번에는 껄껄껄 웃음이 났다.


흔한 겨울 폴란드 풍경 © 2021.이루나.all rights reserved


겨울이고 어둡고 추운 건 이미 아는 사실이고 바뀔 수 없는 것이나 제쳐두고 이번에는 가능한 즐거움을 찾아보기로 했다. 뜨지 않는 해를 기다리며 마드리드의 해를 그리워하기보다는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재미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일단 하나의 조건은 충족되었다. 아무 말도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 그동안 이게 얼마나 그리웠던가.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쓰는 곳에 있다는 것은, 오래 사는 사람에게야 생활의 불편함과 불이익으로 이어져 힘든 부분이 있겠지만 잠시 머무는 여행자에게는 축복이다. 딱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무방비한 상태에서 들리거나 보이는 부정적인 언어와 글자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더듬더듬 폴란드어로 '고맙습니다'만 이야기해도 서로 하하하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꽤나 아름다운 대화가 된다. 남들과 주변에 대한 레이더를 완전히 꺼둘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고 자유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글자 대신 그림과 내용물로 이리저리 짐작해야 하기 때문에 장보기가 모험이 된다. 외국 마트에 가면 재밌는 이유가 바로 이 낯섦때문은 아닐까 한다. 인간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수렵채집의 본능을 외국 마트는 충족시켜 준다. 그렇게 낯선 와중에 채집해온 물건이 기대 이상으로 좋거나 맛있다면 아주 뿌듯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마트풍경, 이게 뭐라고 여행자는 사진을 찍어둔다 © 2021.이루나.all rights reserved


그리고 이번에 안 사실인데 폴란드의 겨울 해가 딱히 충격적으로 짧은 것도 아니었다. 마드리드보다 1시간 일찍 해가 뜨기 때문에 3시 반에 해가 진대도 사실 마드리드 기준으로는 4시 반에 해가 지는 셈이다. 실제로 해가 떠있는 시간은 마드리드와 1시간 반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물론, 맑은 날이 많은 마드리드는 해가 지고도 석양이 꽤 오래 비추는 반면 폴란드의 해는 인정사정없이 뚝 떨어지긴 하지만 말이다.


또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무지 어둡고 칙칙해 보여도 막상 밖으로 나가면 창 밖에서 느껴지는 것만큼 어둡지는 않다. 걷다 보면 내가 가는 길 쯤이야 다 보이는 데다가 눈꽃이 핀 나무 사이 안갯속을 걷는 기분은 상당히 운치 있기도 하다. 밖이 좀 추운 대신 어딜 가나 난방이 잘 되어 있는 편이고 간혹 구름 사이 파란 하늘이 얼핏 보일 때면 무지 반갑고 기분이 좋아진다.


안개가 있다고 길이 없는 건 아니야 © 2021.이루나.all rights reserved


난방이 빵빵이곳 스타벅스에 앉아 창밖으로 하늘을 보니 지금도 빠르게 흐르는 구름 사이 파란 하늘이 보인다. 마드리드 하늘에서는 흰구름이 반가울 때가 많았는데 이곳에서는 구름 사이 가끔 보이는 저 파란 하늘이 반갑다. 이제 두 시간 반 뒤면 또 밤이다. 오늘은 날씨도 영상 4도 정도로 춥지 않아서 이런 날에는 좀 나가서 걸어 두어야 한다. 어쩌면 내일은 오늘보다 춥거나 눈비가 올 수도 있고 그럼 밖을 걷는 대신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즐거움을 재빠르게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다시는 겨울의 폴란드는 안 올 거라고 떠났는데 두 번 와보니 알겠다. 그 와중에도 감사하고 즐거운 일은 분명 있다는 것과 첫 인연이 나빴다고 영영 나쁘라는 법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다시 마주할 일상의 삶과 인연 속에서도 겨울의 폴란드를 기억해야겠다. 

때로는 미워도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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