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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l 01. 2022

힘들면 잠깐 포기하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도 다 삽니다.

"내가 루나 씨한테 제일 싫은 게 그거라고!"


상사였던 그가 내게 말했다. 그는 내가 계약되어 있던 인턴 기간보다 더 빠른 날짜에 계약을 종료하고 싶어 했고 그 말에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을 뿐인데, 그런 내 태도가 싫다고 했다. 아쉬울 게 없어 보이는 태도, 그게 제일 싫다고 했다.




나는 '깡'이라는 게 갖고 싶었다. 깡 없어 보인다, 간절해 보이지 않는다, 종종 그런 평가를 들었다. 내 딴에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 평가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내가 뭘 더 해야 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오히려 불합리하게 느끼는 순간에도 참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깡 없어 보이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랬다.


매번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녔음에도 만 7년 차가 되어서야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것도, 적어도 7년을 다녔으면 결코 쉽게 포기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회사를 다녔어야 했을까. 첫 회사였던 외국계 대기업의 대리는 매일 출근할 때 '악!!!!!' 소리를 지르며 출근한다고 했다. 정말 너무 치 떨리게 오기 싫어서, 지랄 같은 상사를 견디기 어려워 매일 아침 소리를 지르며 출근한다고 했다. 그런 말처럼 그는 충분히 어두웠고 충분히 지쳐 보였다. 나는 출근하며 그런 적은 없었다. 그냥 단순히 그날 해야 할 일이 지겹고 귀찮았을 망정, 소리를 지르며 출근해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늘 중간에 포기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간절해 보이지 않아요."


이런 소리는 기어코 순례길에서도 들었다. 그런데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순례 시작점에서 불과 5시간 거리에 사는 사람이었고, 스페인어를 할 줄 알고 현지 사정을 안다는 이유로 사전 준비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준비한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쉽게 취득할 수 있었다. 또 순례를 하던 때는 일을 정기적으로 하던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반드시 끝내고 돌아와야 하는 날짜도 없었다. 순례도 다소 즉흥적으로 결정해서 왔으니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


이상하게 순례길을 걸을 때면 그렇게 계란후라이가 먹고 싶더라 ⓒ 이루나


하루는 팔렌시아에 속한 도시 프로미스타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순례길에서 만나기로 했던 지인이 사정이 바뀌어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나의 신앙생활에 길잡이가 되어주고 첫 순례 날부터 나를 응원해주던 사람이었다. 사실 아침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의 감정보다는 그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으나 걸을수록 점점 내 감정이 더 요동치기 시작했다.


같이 걷던 사람들이 하나둘 앞서 가고, 다시 또 홀로 길에 남았을 때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날 순례길에서 만났던 소중한 친구가 주었던 우비를 꺼내 입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배낭까지 제대로 덮을 수가 없어 대충 머리만 감쌌다. 다시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오고 모든 순례자가 다 떠난 그 길을 홀로 꾸역꾸역 걸었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프로미스타에 도착해 첫 카페-바를 보는 순간, 나는 일단 거기서 쉬기로 했다. 20분만 더 가면 알베르게가 나올 텐데 도무지 가고 싶지 않았다. 그간 계속 알베르게의 도미토리에서 잠을 푹 자지 못해서 그런지 그날만큼은 절대 도미토리에서 자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미친 듯이 마드리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불과 4시간 정도만 가면 갈 수 있는 나의 집, 한 번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바에서 맥주와 타파스를 시켜놓고 마드리드로 가는 법을 검색했다. 사실 프로미스타가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약 1시간 반 뒤에 프로미스타에서 출발해 중간에 바야돌리드라는 곳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마드리드로 가는 루트가 구글맵에 떴다. 그걸 보는 순간 정말 더 이상 순례길을 걷고 싶지 않아 졌다.




그날 저녁 나는 돌아왔다. 마드리드로.

10km를 더 걷는 건 그렇게 힘들었는데, 수백 킬로미터의 길을 시속 250km로 가는 고속 기차를 타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마드리드에 당도했다. 마드리드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 뒤, 프로미스타의 바에 있던 사람들에게 마드리드행 기차가 진짜 있는 게 맞는 건지 물었다. 그들은 각자 머리를 맞대고 스마트 폰을 보며 내게 기차역으로 가는 방법과 경로를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혹시 기차를 놓치게 되면 걱정 말고 다시 이 바로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기차역은 마치 간이역처럼 역무원도 없는 곳이었고 기차표도 살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대신 기차표 판매 기계가 있어 일단 바야돌리드행 기차를 어찌어찌 구매했는데 기차를 타고나니 검표원이 내가 구매한 표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결재 문자까지 다 왔었다고 보여줬지만 혹시 환불된 게 없는지 확인해 보라 해서 은행 어플까지 들어가니 진짜 결재된 금액이 그대로 환불되어 있었다. 나는 잽싸게 사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바야돌리드가 아니고 마드리드이다,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다른 승객들의 표를 다 검표하고 나서 다시 내게 왔다.


이미 바야돌리드와 마드리드에 있는 직원들과 다 이야기를 해뒀다며, 원래는 각각 다른 표를 사야 하지만 여기서 바로 한꺼번에 결재하게 해 준다고 했고, 바야돌리드에 도착하면 마드리드행으로 갈아타는 플랫폼까지 같이 가준다고도 했다. 실제로 그는 바야돌리드 역에서 내려서 다른 먼 플랫폼까지 나와 함께 가주었고 그 플랫폼으로 가니 그 직원과 이야기했던 다른 직원이 이미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기차 안에서 표를 결재했기 때문에 결재 영수증만 있고 표가 없었는데 그걸 보고 다른 검표원이 갸우뚱 하자 그 직원은 이미 확인된 승객이라며 그냥 들여보내 주었다.


시속 4km로 걷다가 250km 고속기차 타고 놀래서 찍어 본 사진 ⓒ이루나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호의들이다. 내가 지쳐 보였을 수도 있고 바람과 비에 몰골이 엉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순례길을 포기하고 돌아가던 나를 모두가 그렇게 도와줬다. 그래서 돌아가던 순간부터 이미 다시 돌아오리라 결심했었다. 마침 주말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주말만 좀 쉬고. 약속한 원고도 좀 쓰고. 이 순례길에서 보지 못하게 된 지인에 대한 아쉬움만 좀 추스르고. 그러면 나는 돌아오리라 기차 안에서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돌아갔다. 집에 머무는 동안 쓸데없는 짐은 다 버리고 6kg가 된 가벼운 배낭을 메고서. 덕분에 돌아간 뒤부터 걷는 건 더 이상 많이 힘들진 않았다. 여러 순례자들이 내 배낭의 길이와 포지션을 조정해준 덕이기도 했고, 절대적인 무게가 가벼워져 더 이상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동안 무거운 배낭과 잘못된 착용법으로 다리보다 어깨가 더 결리고 멍이 들만큼 아팠는데 돌아와서는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했다. 내가 쉬는 동안 부지런히 걸어온 순례자 친구들을 다시 만나 그들과 남은 코스를 함께 걸었다. 더 이상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은 길이었다.


만약 그날 프로미스타에서 포기하고 돌아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물론 다른 좋은 사람들과 다른 행복한 추억을 쌓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포기하고 돌아가던 날, 나에게 보여준 모든 사람들의 호의에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다시금 좋아하게 되었고 배낭의 무게를 많이 줄여 돌아온 다음부터는 어깨 통증에 한밤중에 잠에서 깨지도, 괴로워하지도 않고 걷는걸 좀 더 즐기게 되었다. 중간에 몇 구간을 건너뛰긴 했지만 덕분에 다시 처음 같이 걸었던 순례자 친구들을 만나 행복한 길을 걸었고 그런 날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삶에 대해 새로운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간절함도 깡도 없는 순례자였다. '악!!!'소리를 내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어떻게든 모든 길을 다 걷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잠시 포기하고 얻은 것들도 많았다. 삶에서도 길에서도. 보지 못했던 걸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덕분에 삶과 길을 더 아끼고 좋아하게 되었다. 적어도 내게 이 길은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하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내가 찾고 싶었던 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지나 나와 싸워 이기는 힘이 아니라 행복, 그 쪽에 더 가까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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