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40도가 넘는 더위를 뒤로 하고 여름휴가차 폴란드로 떠났다. 벌써 네 번째 만나는 폴란드이다. 마드리드에서는 폴란드 대표 관광도시인 크라쿠프로 바로 도착하는 라이언에어 직항이 있다. 크라쿠프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생가와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황님이 대주교로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공항 도착 순간부터 교황님의 사진이 곳곳에 보인다. 공항의 이름도 다름 아닌 ‘요한 바오로 2세 공항’이다.
토요일 밤에 도착해 다음 날이 바로 주일이었기 때문에 이번 폴란드 여행의 첫 행선지는 성당이었다. 미사는 주로 머물었던 카토비체라는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 왕 성당’으로 갔다. 오랜만에 다시 보아도 여전히 감동스러운 폴란드의 신앙심이다.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무릎 절을 하는 모습, 미사 시작 전 일찍 도착해 기도하는 모습, 특별한 주일도 아닌데 고해소 앞에 길게 줄을 서 기다리는 신자들, 또 미사 중에는 경건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임하는 그런 모습들이 모두 다 감동이다. 보통 유럽의 다른 성당에 가면 건축물의 화려한 모습을 보는데 정신없는데, 폴란드에서 만큼은 신자들의 이런 모습에 보느라 아름다운 건축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카토비체의 그리스도 왕 성당 (c)이루나
비록 폴란드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알아듣는 것이라곤 간간이 들리던 고유 명칭뿐이었지만 독서와 복음 말씀을 따라 나도 성경을 읽으며 미사에 최대한 참례하려 노력했다. 가톨릭 미사는 어디서나 같은 독서와 말씀을 듣고 같은 양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알아듣지는 못해도 대충 어느 부분을 하는지는 알 수 있어 폴란드 신자들과 함께 나도 나의 언어로 응답했다. 미사 중 ‘보편지향 기도’도 그렇게 같이 기도를 올렸다.
사실 가족의 권유에 십수 년 전 얼떨결에 세례를 받고도 한참 동안 신앙심을 갖지 못했던 나는, 지난 성탄절 폴란드에서 보았던 신자들의 순수한 신앙심에 감동을 받은 후 지난봄부터 본격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기 시작한 초보 신자이다. 때문에 최근까지도 성경 말씀은 물론, 말투와 형식까지 모두 다 어색하고 낯설게만 느껴졌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와닿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보편지향 기도’이다.
보편지향 기도는 그 이름처럼 개인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기도이다. 보통은 교회 공동체, 위정자와 온 세상의 구원 그리고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이들 순으로 기도를 바친다. 봉사자가 기도문을 외우면 모두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응답하게 된다.
이 기도가 제일 내키지 않았던 이유는 이랬다. 우선 교회 공동체를 위한 기도문은 마치 지나친 집단주의의 강요 같아서 거부감이 느껴졌다. 위정자를 위한 기도에선 내가 왜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밖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는 도대체 이 기도가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의심이 들었다. 하여 이 기도를 따라 할 때면 너무나 형식적이고 심지어 위선적이라는 생각까지 들곤 했다. 이번 여름 폴란드에서 참례한 주일 미사에서도 보편지향 기도를 함께 올리며 여전히 기계적인 마음으로 응답할 뿐이었다.
그다음 주일에는 크라쿠프에 있었다. 대성당 주일 미사를 가고 싶었지만 차를 주차한 곳에서 대성당까지 거리가 좀 있어 걸어가다가 미사가 있는 아무 성당에 얼른 들어갈 생각으로 비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역시나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사가 진행되던 성당을 만났다. 폴란드는 미사 때 신자석이 모자라 서 있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그 성당은 심지어 그 비가 내리는 밖에서 무릎을 꿇은 채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까지 있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간절히 기도하게 하는 걸까? 이들이 향하는 그 존재는 누구일까?
성당 밖에서 비를 맞으면서도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들 (c)이루나
이후 내가 폴란드의 신앙심에 처음 감동을 받게 한 장소인 쳉스트호바의 야스나 구라 수도원을 다시 찾았다. 보통 검은 성모상이라 불리는 기적의 성모상이 있는 곳이다. 한때 복음사가 중 한 명인 루카가 그린 실제 성모님 얼굴이라고도 알려졌던 그림이다. 이 성모상 앞에서 폴란드의 역사적 부침이 있을 때마다 신자들이 모여서 전구를 청하며 기도했고 그런 기도가 여러 번 이루어졌기에 폴란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성모상이기도 하다. 이 성모상이 있는 예배당을 신자들이 무릎으로 걸으며 한 바퀴 도는데 이제 당분간은 폴란드에 다시 갈 기회가 없을 듯하여 꼭 이번에 나도 무릎기도를 하고 싶었다.
밝은 산이라는 뜻의 야스나구라 수도원으로 향히른 성모 마리아 길 (c)이루나
예배당에는 미사가 없는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로 조심스레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다만 무릎으로 걸으며 예배당을 도는 걸 실패하고 말았다. 일부러 긴 청바지까지 입고 갔건만 예배당 돌바닥에 닿는 무릎이 정말 부서질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앞선 폴란드 사람들을 따라 최대한 무릎을 떼지 않고 슥슥 걸어보려고도 노력했는데 어떻게 걸어도 너무 아프고 뒤에 계속 오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손을 짚고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예배당을 겨우 돌았다. 그 꼴에 스스로 당황스럽고 민망하여 기도고 뭐고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앞으로 나가는데만 열중할 뿐이었다. 이 당황한 마음은 이후 수도원 미사를 참례하며 겨우 다시 차분히 다잡았다.
검은 성모상 예배당에 모여 기도 중인 사람들 (c)이루나
폴란드를 떠나던 날은 다시 토요일이었다. 폴란드에서의 마지막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도착 후 첫 주일에 갔던 성당으로 갔다. 비가 오는데도 미리 와 기다리던 다른 신자들과 함께한 정오 미사에서 또다시 보편지향 기도를 했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폴란드 사람들 사이에서 이 간청을 나의 언어로 올리며 그날 처음으로, 그리고 비로소 이 기도가 마음에 닿았다. 내가 떠나고 없어도 이곳은 나와 모든 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겠구나. 그리고 갑자기 좋아하는 성가인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가 떠올랐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폴란드에서의 마지막 보편지향 기도를 함께하며 지난 2주간 보았던 수많은 폴란드 신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비가 내리는 성당 밖에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이들, 거동이 불편해 영성체를 하러 일어설 때 다른 이에게 부축을 부탁하면서도 가장 앞에서 참례하던 할머니, 수도원 미사에서 내 옆에 있던 수녀님의 따뜻했던 손, 작은 교회에서 나란히 부모님을 따라 기도하던 소녀 둘, 혼자서도 기꺼이 미사에 왔던, 성당보다는 어쩐지 맥주집에 있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아 보이던 수많은 젊은 사람들, 이들은 내가 폴란드를 떠나도 여전히 미사를 올 것이고 그 미사에서 이 보편지향 기도에 진심으로 응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도가 무슨 힘이 있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 바로 내가 하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기도해준다’라는 말이 참 쉽고 하찮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정말 외로워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순간 나는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바로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알 것이다. 누구나 사는 일이 그러하여, 나 또한 외롭고 적막한 순간이 찾아오면 폴란드에서 본 기도하는 이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기도 소리를 마음으로 들으려고 노력하며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본다. 그리고나도 사랑하는 이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또 아직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홀로 외로움을 감내하고 있을 이들을 위한 작은 기도를 올려 본다. 그 기도가 당장 어떤 도움은 될 수 없겠지만 위안은 줄 수 있다는, 때로는 그 위안이 우리를살게 하는 힘이라는 깨달음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