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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Dec 21. 2022

스페인에서 아줌마라고 부르면 생기는 일

내가 세뇨라일리 없어!

얼마 전 인스타 릴스로 우연히 본 영상이 하나 있다. 어리다고 하기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해서 명백히 나이 들지도 않은 여성들에게 '세뇨라'라고 부를 때 여성들이 느끼는 감정을 웃기게 표현한 영상이었다. 병원 대기실에 있던 한 여성은 '세뇨라! 들어오세요'라는 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중년 여성을 부르는 줄 알고 '엇, 이분보다 제가 훨씬 일찍 왔는데요?' 라며 따지려 한다. 그런데 이를 들은 병원 직원이 '네, 그러니까 세뇨라 들어오시라고요.' 대답한다. 본인이 세뇨라였단 걸 아는 여성은 당황해 말을 더듬는다. 또 다른 여성은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세뇨라! 공 좀 주세요!'라는 소리와 함께 자기 쪽으로 굴러 들어온 공을 본다. 그 소리를 들은 여성은 열받은 몸짓으로 공을 엉뚱한 방향으로 차 버린다. 마지막 여성은 자기가 깜빡한 가방을 주운 남자가 '세뇨라! 가방 잊었어요!'라고 뒤쫓아가며 찾아주려고 하자 '세뇨라'라는 단어에 기겁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르게 걸어간다. 여자가 빠르게 걸을수록 남자는 더 큰 소리로 '세뇨라!! 세뇨라!! 가방이요 가방!!' 하면서 쫓아오고 급기야 여성을 가방도 포기한 채 달려서 도망간다.


스페인에 살다 보면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것 같다. 한국어로 치면 아줌마 혹은 아주머니에 가장 가까운 세뇨라라는 호칭을 스페인어권 여성들도 이렇게 싫어하는구나 새삼 낯설게 느낀다. 사실 세뇨라라는 단어를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 어학사전에서 찾아보면 '성인에게 존중과 공경을 가지고 부르는 호칭'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그런 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여 왔기 때문에 크게 반감을 안 가지고 있던 단어 중 하나이다. 스페인에 살면서 종종 세뇨라라는 호칭을 들었지만 대체로 좀 좋은 식당이나 장소에서 들었던 지라 더욱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물론 굳이 세뇨라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나이 들어가고 있음을 실감하는 때는 적지 않다. 가을이 한창이던 지난 몇 주, 계절이 바뀌면 털갈이하는 동물이라도 된 듯 나의 머리카락도 샤워 때마다 우르르 빠지곤 했는데 젖은 머리를 말리며 관찰해보면 그간 눈여겨봐 둔 흰머리들은 그 와중에도 절대 빠지지 않고 굳건했다. 오른쪽 귓바퀴 위에 세 가닥, 왼쪽 귓바퀴 쪽에 두 가닥,  정수리 부분에 두 가닥. 아직은 수를 세고 기억할 만큼의 양이어서 그들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삼십 대 중반까지도 흰머리가 하나도 나지 않았던 사람이라 언젠가 흰머리가 나면 그건 진짜 나이듦의 표징일 거라 생각해왔기 때문인지, 흰머리를 마주치는 일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한편으론 지난 몇 주간의 험한 털갈이에도 여전히 뿌리를 지켜낸 흰머리를 보며 '에고 그래도 이들은 흰머리 중에선 제일 젊은 애들이구나. 그러니 이리 쌩쌩하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더랬다.


흰머리야 심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하루에 비타민을 10배씩 때려 먹고 몸에 좋다는 영양제도 다 챙겨 먹는데 진짜 몸 어디 깊숙이부터 고장 난 듯 쉽게 지치고 피곤한 일이 부쩍 잦아지면서 이제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건강부심이 있을 정도로 체력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올해만 벌써 감기에 몇 번을 걸린 줄 모르겠다. 요즘은 우스갯소리로 '사람이 평생 걸어야 하는 양이 있는데 나는 지난 3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느라 그 양을 미리 다 써버린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실제로 순례길 이후 오래 걷는 게 너무 피곤하고 힘들다. 걸음속도가 느려진 건 덤!


오랜만에 푸념이 길었다. 지금도 침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니 허리가 아파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앉고 안경을 쓰지 않으니 눈앞이 흐릿해 몇 번이나 모니터의 밝기를 조절하고 눈을 괘슴츠레 떴다 감았다 했는지 모른다. 연말은 언제부터인가 '아니 이렇게 한 해가 빨리 갔다고?' 경악하다 '아니 그럼 내가 벌써 몇 살이야?'라고 뜨악하기를 반복하는 시즌이 되었다. 나이에 걸맞은 경제력과 지식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는다 해도, 나이에 걸맞은 지혜와 인품은 갖춘 사람인가 하는 고민은 더 마음을 조급하게 하기도 한다. 사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많을 텐데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얼마나 보기 싫을까 글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걱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나름의 변명은 있다. 이 나이는 처음이라, 나도 오늘이 내가 살아온 날 중에서는 제일 늙은 날이라, 주관적인 비교 대상은 오늘의 나보다 어렸던 나 말고는 없다. 물론 이 말을 뒤집으면 흔히 말하듯, 오늘은 남은 날 중 제일 젊은 날이 되기도 하겠지만.


아무것도 안 했는데 세뇨라라니! 그렇지만 어차피 되어야 하는 세뇨라라면, 조금 더 밝게 웃고 조금 더 유쾌한 세뇨라가 되면 좋을 것 같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가 부여하는 호칭은 바꿀 수 없다 해도 그 앞의 수많은 형용사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니 말이다. 내년에는 어떤 세뇨라가 되어 있으려나. 아무쪼록 잘 살아보거라 내 자신!


마드리드 도심의 연말 풍경 (c)이루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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