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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an 12. 2022

스페인에서 먹는 떡국 한 그릇

열흘이나 늦은 새해 단상

태어난 곳을 떠나 살다 보면 종종 그런 때가 있다.

고향 음식이 견딜 수 없이 먹고 싶어 지는 순간.


외국에 오래 살아 고향의 말은 잊어버릴지언정 고향의 맛은 잊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외국의 갖가지 채소로 김치를 만들고, 굳이 어렵게 막걸리를 담가 먹었던 이전 세대의 이민자들을 보면 그 말이 실감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유년 시절 세계인의 축제 88 올림픽을 경험하고 초등학교 생일 파티를 맥도널드에서 하던 시대를 살았던 나에게는 고향의 맛이 주는 각인이 깊지 않다. 그러니 365일 중 360일을 김치 없이 살고, 쌀 1kg 사면 한 달을 넘게 먹는다.


그런데 올 새해는 종종 찾아오는 그것이 오고 말았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향 음식에 대한 갈증, 그것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새해 음식 '떡국'이 너무 먹고 싶어졌다.


단순히 새해가 돼서 떡국이 생각났다고 하기에는 이미 스페인에서 열두 번째 맞는 새해이다. 지난 열한 번 동안은 단 한 번도 떡국이 먹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던 음식이다. 새해에 다 같이 명절 음식을 먹을 때면 그냥 밥에 전과 잡채 같은 음식만 먹고 싶은데 그럼 한 살 더 못 먹는다고 꼭 떡국을 먹게 했다. 정말 그렇게 나이를 안 먹을 수만 있다면 지금은 '감사합니다'하고 평생 떡국은 쳐다도 안 보고 살겠지만, 그때는 한 살 더 안 먹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억지로 떡국을 먹곤 했다. 대신 최대한 떡은 조금, 그리고 김가루를 왕창 뿌려서 마치 김국에 가깝게 먹는 게 그때의 내가 떡국을 먹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어떤 해는 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어 할머니께 따진 적이 있었다. 바로 다른 집안에서는 떡국에 떡만 넣어 먹는 게 아니라 무려 만두를 넣어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떡만둣국이라면 크게 한 그릇 뚝딱 먹을 자신이 있는데 왜 우리 떡국은 만두를 안 넣는 거냐며 볼멘소리를 했었다. 남쪽 도시 사람이었던 할머니는 '북쪽 동네는 쌀이 모자라니까 만두를 넣어 먹지, 호남은 쌀이 많아서 그럴 필요 없다' 했다. 호남이 평야지대라 쌀농사 짓기 좋다고 했던가, 사회시간에 배웠던 걸 떠올리며 그 해도 쌀떡만 가득한 떡국을 먹었다.




고향 음식에 대한 갈증이 찾아오면 그 비슷한 음식이라도 먹어야 당분간 그 음식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나는 별 수 없이 아시아 마트를 가서 딱 한 봉지가 남아있던 소중한 떡국떡을 사 왔다. 막상 떡국떡이 생기니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져 떡국 대신 괜한 궁중 떡볶이나 해 먹으며 여유를 부렸다. 어느 날은 스페인에 와서 처음으로 라면에 떡국떡을 넣어 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이러다 떡국은 끓여 먹어 보지도 못하고 다 써버리겠다 싶어 드디어 오늘, 미뤄왔던 떡국을 끓이기로 결심했다.


참기름에 소고기 국거리를 볶다가 그걸로 육수를 내고 푼 계란물을 휘휘 둘러 끓인 뒤 김가루를 고명으로 얹어 먹는 게 어렸을 때 먹던 스타일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 먹던 떡국을 별로 안 좋아했던 기억 때문인지 왠지 그렇게 먹는 건 당기지가 않았다. 끝끝내 만두 넣은 떡국을 못 먹었던 아쉬움이 생각나 만두를 넣어 만들어 볼까 했지만 만두까지 빚는 수고로움은 둘째 치고라도 많은 속재료가 들어간 만두가 국물 맛을 탁하게 할 것 같아서 역시 내키지 않았다.


결국 최종적으로 경상도식으로 불리는 떡국을 만들기로 했다. 따로 조리한 각종 고명으로 맛을 내고 대신 국물은 육수 없이 맹물에 간만 해서 끓이는 방식이다. 보통 두부도 고명으로 많이 올리는 모양인데 두부는 좋아하지만 떡국 고명으로 먹기에는 또 별로 내키지 않아 양념한 소고기와 계란 지단 딱 이 두 가지로만 깔끔하게 만들기로 결정했다. 육수도 맹물 대신 황태, 노가리, 멸치 등이 들어간 다시팩으로 국물을 냈다. 국물 맛을 온전히 즐기고 싶어 김 고명 폭탄을 투하해 먹었던 어렸을 때와 달리 김 고명은 따로 올리지 않았다.

 

소고기 고명이 좀 더 적었다면 더 예뻤겠지만... 고기는 맛있으니까! ⓒ 2022.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떡국도 처음 끓여 본 집에 김치나 각종 밑반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단출한 떡국 상이지만 대신 떡만큼이나 고기를 듬뿍 얹어 든든히 먹었다.




어린 시절 떡국에 만두도 넣어 먹자는 주장이 결국 안 받아들여졌을 때, 키우고 싶던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을 때 나는 생각했었다. '어른만 되면'. 어른이 된다는 게 모든 간섭과 제한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인 줄만 알았지 그보다 더 큰 책임과 고단함이 같이 따라온다는 건 모르던 나이였다. 그 원하던 어른이 되다 못해 이제 빗질을 하다 하나둘 발견하는 새치에 순간 슬퍼지는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손수 떡국을 끓여 먹어 본다. 여전히 만두는 넣지 못했고 강아지도 없다. 문득 만두를 빚으려면 고단하고 강아지를 기르려면 책임감이 따르기 때문에 아직도 둘 다 갖지 못했는가 싶다. 그러다 이내 그런 쓸데없는 생각 따위는 익숙한 새해의 맛과 함께 꿀떡 삼키며 비로소 올해와 늦은 인사를 한다. 기왕 떡국도 먹었으니 올 한 해는 좀 더 잘 나이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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