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중 가장 지각이 쉬운 계절은 아마도 봄이 아닐까 싶다. 어제까지 움츠리고 다니던 어깨에 내려앉은 따뜻한 햇살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면 벌써 꽃이 다 폈다. 마음이 어둡고 서러운 시절에도 봄은 부지런히 제 몫을 해낸다.
봄은 그랬다. 어둠이 짧아지고 온화한 온도는 아직 웅크려만 있고 싶은 나의 마음을 기어이 끄집어냈다. 코로나 격리 기간에는 창밖으로만 보던 봄을 지난해 봄에는 매일 걸으며 느꼈었다. 익숙한 느낌에 지난 사진을 뒤져보니 작년 오늘은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이었다. 이 시간 나는 아직 친구들과 산티아고 입성 전야제 축배를 들이켜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예뻐 걸음걸음 아껴 걸었던 길들이었다.
작년 오늘 걸었던 길, 하늘도 바람도 풀도 꽃도 너무 아름다웠다 (c)이루나
며칠 전, 순례길에서 만났던 스페인 친구 미겔을 마드리드에서 다시 만났다. 충분히 날쌔게 걸었으면서도 늦게 걷는 내가 혼자 뒤처지면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비가 내리는 길에서도 나무 밑에 앉아 나를 기다려주던 친구이다. 그때 그 친구가 먹고 힘내라며 건네준 치즈는 또 얼마나 맛있었는지, 그 뒤로도 우린 두고두고 "미겔의 치즈"를 그리워했다. 중간에 어깨가 탈골되는 바람에 길을 다 마치지 못하고 바르셀로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남은 길을 다시 걷기 위해 나선 김에 마드리드에 들러 나를 만났다.
난 꺅 소리를 지르며 미겔을 안았고 그 순례길에서처럼 그 누구보다 크게 웃고 이야기했다. 각자 삶에 바빠 자주 이야기하지는 못했어도 며칠을 꼬박 같이 다닌 그 걸음은 여전히 우리를 이어주고 있었다. 나는 산티아고 도착 날을 이야기하며 사실 거기 도착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다음날 피니스테레 가는 버스에서 오바이트를 했었다는 부끄러운 고백도 했다. 순례길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내 자신이 한심하고 싫었다는 반성과 함께. 이 이야기를 했을 땐 막상 듣고도 그냥 흘러들었는데 이 친구가 이런 대답을 했다.
순례길이 꼭 어때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런 날도 있는 거지 그것 때문에 너의 순례길이 의미 없어진 건 아니라고.
빗속에도 낯선 이에 불과하던 나를 기다려준 사람은 술주정뱅이에게 이런 말도 하는구나. 그날 힘든 걸음 끝, 나를 보고 환히 웃던 그 미소 같다며, 미겔을 만나고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야 나는 비로소 자각한다.
움츠리고 걷는 어깨를 감싸는 햇살처럼, 봄도 사람도 별안간 와서 웅크린 나를 걷게 한다. 왜 걷는 거냐고 내 안의 나는 때로는 냉소를 보내고 다그치고 되묻고, 그러다 느려지고 넘어지고 또 술을 마시며 우는 나를 비아냥 거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별안간 어둠이 걷히며 누군가는, 무언가는 손을 내민다. 그러니 오늘 걸음이 힘들어도 조금만 더 걸어봐야겠다. 어쩌면 이 느리고 지친 나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또 다른 미겔이, 그 미겔이 내게 건네는 치즈를 만날지도 모르니. 또 삶이 꼭 어때야 하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