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9월이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조카아이는 나를 참 좋아한다. 다른 도시에 살아 한 계절에 한 번이나 보는 아이인데도 그렇다. 만나면 내 손을 꼭 붙잡고 걸어 다니고 이런저런 놀이를 같이 하고 조잘조잘 쉬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한나절을 있으면 한나절 내내 내 옆에만 붙어 있던 아이는 이상하게 헤어질 때만 오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이제 가야 해서, 또 지금 가면 다음 계절이나 볼 것 같아 한번이라도 더 아이와 포옹하고 뽀뽀하고 싶은데 애타게 불러도 방에서 요지부동이다. 왜 그러나 들어가 보면 아예 등을 돌리고 혼자서 아까 나와 같이 놀던 장난감만 붙잡고 있다.
"이제 진짜 갈 거야. 뽀뽀 안 해줄 거야?"
끝내 고개도 안 돌리는 아이를 뒤에서 꼭 안고 나오며 난 애들은 재밌게 놀다가도 금세 또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순례길도 끝이 났다. 다들 모든 순례자가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막상 산티아고를 코앞에 두면 두 가지 감정이 피어난다. 어서 이 길의 끝을 보고 싶은 마음과 아쉬워 발길이 안 떨어지는 마음이다. 나는 산티아고 도착 한 시간 전부터 한걸음 한걸음 아껴 걸었다.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도 막상 도착을 앞두자 아쉬운 마음이 커졌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채 되지 않았는데 길은 점점 줄어만 갔다. 그렇게 우리는 엉겁결에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 도착해 버렸다.
산티아고 대성당(좌) 거대 향로 보타푸메이로(우) (c)이루나
사실 산티아고라는 도시는 몇 년 전 여행으로 이미 와봤던 도시였기 때문에 광장에 도착했을 때 감동이 아주 크진 않았다. 오히려 '다 걸었다, 근데 이제부터 뭐하지' 하는 생소한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할 건 있었다. 바로 순례자 사무실로 가서 순례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는 것이다. 광장에서 잠시 머물며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여러 기분을 만끽하다 우리는 증명서를 발급받으러 갔다.
그날 밤에는 그동안 함께 했던 순례자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고 초반에 함께 걸었던 다른 순례자 친구들을 기다리기 위해 이틀 더 산티아고에 머물렀다. 그리고 원래 아무 계획 없이 걸었던 나는 역시 계획에도 없었던 서쪽 땅끝마을 피니스떼레까지 친구들과 함께 갔다. 땅끝까지 가니 정말 모든 여정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되었다. 도착한 날 우리는 등대가 있는 언덕으로 걸어가 지는 석양을 보기로 했다.
그날은 바다가 얼마나 잔잔했던지 마치 땅 같이 느껴졌다. 그 바다 위로 구름이 낮고 희미하게 떠 있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것 마냥 보이기도 했다. 오래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점점 거리감이 사라져 손을 뻗으면 하늘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단순한 공간적 개념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날의 하늘만큼은 보다 보면 꼭 어떤 모습을 마주칠 것만 같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화로웠던 피니스떼레의 석양 (c)이루나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 저녁 미사를 갔는데 신부님이 마지막에 순례자들을 위해 강복하시며 한 말씀이 있었다. 주님께서 순례길에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신 것과 같이 삶의 여정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부탁하며 우리가 길 위에서 얻고 느낀 것을 삶에서도 행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씀이었다. 순례길에서 남들 다 울 때도 크게 눈물 흘린 적 없던 나였지만 이날 미사에서는 좀 많이 울었다. 나는 피니스떼레에서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왔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부터 나는 그간 여정을 함께 했던 순례자들과 계속 작별을 했다. 그리고 피니스떼레에서 가장 오래 함께 하고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친구와도 작별해야 했다. 그들은 이틀 더 거기에 머물 예정이었고 난 급하게 잡힌 약속 때문에 마드리드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두 친구와는 거의 순례 내내 함께 했고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순례길 중간에서 한 번씩 헤어졌을 때도 너무 아쉬워했던 사이였다.
그런데 막상 진짜 이별은 매우 싱거웠다. 갑자기 아침 일찍 산티아고로 돌아가서 마드리드행 기차를 타기로 결정했고 바로 20분 뒤에 오는 버스를 타야 했기에 아직 잠에서 덜 깬 독일 친구와 어둑한 방에서 가벼운 포옹으로 긴 인사를 대신했고 아침을 준비하던 오스트리아 친구와는 "근데 커피라도 마실래?" 뭐 이런 말과 또 다른 포옹으로 인사를 마쳤다. 이 친구들은 갑작스럽게 내가 떠난다는 사실에 굉장히 당황해했는데 난 그런 친구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버스를 탄다며 나가버렸다.
그렇게 내가 탄 버스가 땅끝에서 멀어질 때 나는 문득 조카아이가 떠올랐다. 헤어질 때 조카아이도 늘 그런 마음이었겠구나. 너무 거창히 헤어지면 진짜 이별하는 것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이렇게 무심히 헤어지면 꼭 아무렇지 않게 곧 다시 볼 것만 같아서 나도 사소한 작별인사가 하고 싶었나 보다. 이제 정말 긴 여정을 마치며 나는 그곳에서 마주쳤던 모든 인연들과 풍경에 작별 인사를 했다. 아주 사소하고 무심하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그래야 금방또다시 볼 것 같았으니까. 만약 누군가내 이별 방식이 다소 차갑다고 느낀다면 언젠가는 이게 나의 가장 큰 마음이었다고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