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브리치《서양미술사》수업 노트
이번 봄, 유럽인문아카데미가 코로나로 온라인 개강을 하게 된 것이 해외 거주자인 나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유럽에 살면서 굳이 한국에서 진행되는 유럽 인문 수업을 듣는다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모국어로 석학의 강의를 듣는다는 건 장점이 매우 크다. 게다가 인생 책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교재로 하는 강의라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으며 좀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크다. 첫 과제는 서론의 내용을 다시 읽고 핵심을 짚어 보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모른 체 하다가 수업 시작 몇 시간 전에야 벼락치기 마냥 이걸 쓰고 앉아 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정리하다 보니 핵심이 아니라 서론의 내용보다 더 길 지경이다. 더 파고들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지금 밑에 정리한 것도 졸려서 멍한 상태로 작성했고 더 쓰다간 수업시간에 기절할 것 같아서 이만 쓰련다. 아무튼 그냥 개인적인 수업 정리 노트인데, 꾸준히 쓰기 위해 굳이 브런치로 쓴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p.15)
서론의 뒷부분에서 말하는 내용과도 일치된다. 미술은 어떤 규칙이나 정해진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파엘로가《초원의 성모》를 그렸을 때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각 인물의 구도와 배치였다. 그는 스케치를 통해 이리저리 다양한 초안을 그려본 후 이 그림을 완성했다. 완성작은 어떤 규칙이나 공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작가의 직관에 따라 가장 적절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였지만 사조가 먼저 정의된 후 이를 따른 것 또한 아니다. 작가들은 어제보다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했을 것이고 그런 노력의 결과가 모여 공통적인 흐름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결국 첫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미술이 존재하고 정의된 후 그를 따르는 미술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가(창조자)가 있기에 이런 창조물이 생기고 그 창조물이 하나의 집단이 되면서 연구, 비교 등을 통해 일정의 사조가 생겨난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이러한 선입견을 버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단 거기에 성공한 미술가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때가 많다. 이러한 화가들은 우리들에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존재를 자연에서 찾으라고 가르쳐준다. (...)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p.29)
'뒤러의 노파 그림이 루벤스의 아이 그림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한편 똑같이 수난으로 고통받는 예수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지만 르네상스 시대 그림은 훨씬 자연스럽고 영광스러워 보이는 반면 중세 그림은 어쩐지 어설프고 투박해 보인다. 이때 다시 이전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럼, 중세 예수 그림이 르네상스의 그것보다 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림을 단순히 취향이나 선입견에 치우쳐 바라보면 이해의 폭이 좁아진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그려진 별이나 빨간색 대신 파란색을 칠한 사과를 보면 바로 무조건 틀렸다고 하는 셈이다. 하지만 실제 별은 우리가 통칭하는 별 모양을 갖고 있지 않다. 또 푸르스름한 새벽녘에 사과를 보았다면 유독 파란색에 더 가깝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파란 사과를 통해 푸른 새벽의 느낌을 강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뒤러는 자신의 어머니인 노파의 주름을 그려 넣을 때마다 지나온 세월에 때론 탄식하고 기억하고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굳이 숨기지 않은 자연스러운 초상을 통해 세월의 무게를 담담하게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그가 추구하는 예술이었을 것이다. 토스카나의 이름 없는 미술가는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재능과 재료를 총동원해 예수의 수난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이미 같은 기준과 상황에서 그려지지 않은 그림을 비교하며 어떤 것이 더 우위인지 논하는 것 자체가 미술에서는 불필요하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그림과 조각 작품들은 원래 미술품으로서 진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술가가 작품을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그 작품을 만드는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p.32)
피카소가 그린 두 개의 닭그림이 있다. 하나는 사실적이고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그려진 그림이라면 다른 하나는 다소 기괴하고 많이 변형된 모습의 닭이다. 단지 미술이 현실의 완벽한 모방만을 의미했다면 첫 번째 그림이 더 잘 그려진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미술가라는 직업은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사라졌어야 한다. 어떤 그림도 사진만큼 더 잘 모방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가는 여전히 존재한다. 기괴한 수탉 그림은 현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처절한 모습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때론 완벽한 모방인 사진보다 더 현실적이고 직접적이다. 미술이 한 시대에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이상, 시대와 인간에 동 떨어져 단순한 감상품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현대 미술에 대한 고민을 해보게 되었다. 수업시간에 나온 뒤샹의 《샘(1917)》이라는 작품과 함께 말이다. 기성품을 사서 자신의 서명만 한 이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게 예술이면 나도 예술가다!'라는 말이 나올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예전에 더 파고들어 충분히 이해가 갔던 지점이 있는데 지금은 복기하는 건 생략하고, 일단 당시 뒤샹이 아닌 일반인이 똑같은 퍼포먼스를 했다 한들 절대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란 건 확신한다.
그가 이 작품의 의미를 부여할 자격을 얻은 건 그 이전 예술적 활동의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의 탄생 시기는 기성품에 대한 화두가 자주 거론되던 배경이 있었다. 그 사회적 배경을 읽는 능력을 갖추었던 예술가가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소재를 선택하였기에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작금의 유명인들의 예술활동에 대한 건 또 다른 생각이긴 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단순한 유명세를 이용해 상업적 작품 활동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반대하지는 않는다. 어떤 계기로 어떤 작품을 만들든 그건 창작자 마음일 뿐, 그 자격을 줄 수 있는 주체는 없기 때문이다. 그 작품이 상식을 벗어난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할지라도 그 역시 구매자의 마음이다. 그가 나름의 기준으로 지불 가능한 가격을 제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미술에는 절대적인 규칙은 없다. 또한 작품 속에 어떠한 기법이 있다 한들, 그 이름을 외워서 작품을 보고 단순히 어떤 부분이 어떤 기법으로 그려졌다는 걸 확인하는 방식의 감상법은 지루하기만 할뿐더러 단순히 지적 허영심을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취향에만 너무 치우쳐 감정적인 감상을 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림은 그려진 이유가 있으며 이는 작가의 인생, 시대, 지역 등 복합적인 배경을 살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좀 더 폭넓은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하며 사유하는 과정은 단순히 예술적 만족감을 주는 것에 채워주는 것에서 벗어나 개인의 사고의 폭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