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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성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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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ark Nov 29. 2021

연기를 꿈꿨던 금융권 직장인

25살까지의 나의 인생 스토리텔링


내가 나에게 하는 말.


1. 항상 작은 목표라도 설정해두자.

2. 그때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바로 실행하자.

3. 다양한 경험을 엮어 내 인생을 텔링 하자.


가끔 친한 동생들의 취업 멘토링을 해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듣는 질문이 "취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학 시절을 효율적으로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같은 말이다.


대학 입시라는 관문을 뚫고 대학생으로서 즐길 수 있는 거리들이 굉장히 많은데, 바로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참 아프다. 그럴 때마다 난 내 얘기를 하면서 위의 3가지를 강조하곤 한다.


1. 20살, 연극 동아리 입단

고등학생 때 '학교-야자-독서실'의 루틴이 싫었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6시 반에 나가면, 학교 야자실에 정확히 6시 56분에 도착했다. 그러면 회색 샤프를 잡고 매3비를 풀었다. 그리고 항상 독서실에서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 1시에 집에 들어와 씻고 잤다. 이런 반복적인 삶이 지겨워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고 여름, 겨울 총 2번의 공연을 올렸다. 한 번은 남편을 죽이는 못된 아내의 삶을 살았었고, 다른 한 번은 인간의 5대 욕망 중 '탐욕'을 연기했다.


동아리 사람들이랑 방학 2달 내내 부대끼면서 생활하는 것도 정말 재밌었고, 무엇보다 연극 끝나고 난 뒤 커튼콜을 할 때 나오는 카타르시스가 꽤나 중독적이었다. 중간중간 아르바이트하며 연기 학원에 등록할 돈도 벌며 나름 진지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20살 말 무렵, 현역 극단 선배와의 대화 이후 꿈을 포기하기로 한다.


선배의 말에 의하면 여자 배우의 삶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다고 했다. 당시에는 미투 운동도 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여자 배우들의 스폰서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다양한 삶을 살 수가 없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 선생님, 어머니, 할머니의 역할을 주로 맡게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물론 지금은 OTT 시장도 커져서 해당 문제는 해결된 것 같긴 하다.) 1년 내내 간절히 원했던 연기자의 삶이 저 말을 듣자마자 이상하게 한 순간에 사라졌다.


2. 21살, 알바 시작

꿈을 잃어서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량처럼 살다가 일단 돈부터 벌어야겠다 싶어, 레스토랑 알바를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진 청담동 테이스팅룸이란 식당이었다. 여기서 나름 9개월을 일하며 숟가락, 젓가락을 닦던 막내에서 한 층을 관리하는 자리까지 갔다.


이 경험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맛난 음식들을 맘껏 먹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매니저님이 "네가 음식을 먹어보고 특징을 알아야 손님한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거야"라며 시식을 적극 권하였다. 나중에 내가 총괄하는 사람이 된다면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한 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일 하며 처음으로 100만 원이 넘는 돈을 모아봤다.  이 돈으로 바로 맥북을 샀고,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맥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3. 22살, 해외 봉사 동아리 가입

알바도 슬슬 지겨워졌고, 교내 동아리도 한 번 해보았으니 다른 활동을 해보고 싶었다. 당시에 교내 홍보대사에 지원을 했다. 근데 떨어졌다. 교내가 안 된다면 교외로 눈을 돌린다, 나를 떨어뜨린 건 정말 큰 실수다, 나는 정말 크게 될 사람인데라고 생각하며 다른 활동을 알아보던 중 YGG(Youth Goodwill Guide)라는 봉사 동아리를 알게 되었다. 가볍게 소개하자면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단체인데 운영팀, 홍보팀, 가이드팀으로 나눠져 있었다. 처음엔 중요 보직을 맡을 생각도 없었는데, 성격 상 그게 잘 안 되어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 운영팀 팀장을 맡고 있었다.


처음 여기 준비했을 땐 영어 면접을 한다고 하여 엄청 겁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름 예상 질문을 최대한 많이 뽑고 그에 대한 답변도 준비하며, 정말 간절히 준비했었다. 그런데 들어와서는 고등학생인 친구들이 나보다 더 영어를 유창하게 해서 지레 풀이 죽었다. 그래서 괜히 혼자 눈치 보느라 영어를 많이 못 썼다. 내 허접한 영어 실력을 드러내기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입이라도 터볼걸 많이 후회가 된다.


그러나 연례행사를 기획하고, 봉사 단원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PPT도 만들고, 밤샘하며 동생, 언니, 오빠들이랑 같이 작업했던 때가 정말 행복했다. 가장 큰 연말 행사가 끝났을 때 사람들이 내 수고를 많이 알아줬는데 그때 눈물 날 정도로 감격했다. 내가 무언가를 책임감 있게 만들어내고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하며 성취감을 얻는 것이 내가 사는 이유인 것 같았다.


4. 23살, 해외 인턴

2-3학년 때 주변 친구들이 해외로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많이 나갔다. 나도 대학생이라면 해외 생활을 무조건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니 하나 같이 하는 말이 돈이 엄청나게 깨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한테 손을 벌리고 싶지도 않았고, 부모님 눈치를 보며 내가 외국에서만 할 수 경험을 못 한 채로 귀국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번 돈으로 생활하고 여행을 하자는 생각에 해외 인턴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알아보기 시작한 시점에 정말 운 좋게도 학교에서 국비지원 해외 인턴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박람회가 열렸다. 당연히 난 참석했고 학교 선배인 한 컨설턴트를 만나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때 준비했던 시간이 정말 고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YGG 활동을 하며 중간, 기말고사 준비도 하였다. 그리고 국비 지원 장학생으로 뽑히기 위해 영어 면접을 2-3차례 정도 보았고, 인턴을 하고자 하는 기업의 면접까지.. 정말 실제 취업 준비보다 험난한 과정을 겪었다. 그렇지만 무엇 하나 허투루 한 것은 없었던 것 같다. 학점도 잘 나왔고(좋아하는 과목만 들어서 그랬을까), YGG 활동도 잘 마쳤을뿐더러, 비행기 값 및 3개월 체류 비용까지 지원받는 국비 장학생으로 뽑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뉴욕에 위치한 도매 회사에서 1년을 근무하게 되었다.


해외 인턴의 목적은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100% 달성하고 왔다. 미국 11개 주를 혼자 혹은 친구들과 여행했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튼은 강남 나가듯이 매주 나가 놀았고, 필라델피아에서는 비 오는 날에 우비 쓰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왕복 16시간의 버스를 타며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았고, 하버드 대학에 가서 총장 동상의 발을 만지기도 하고, 플로리다에서 비행을 공부하는 친구가 있어서 레스토랑에 경비행기를 타고 갔던 적도 있었다. 시카고에서는 제일 저렴한 방을 예약했는데 그게 혼성 방이라 허겁지겁 놀라 방을 바꿔달라고 말하기도 하고, LA에서 쇠파이프로 벽을 치고 다니는 노숙자를 보며 겁을 먹기도 하고, 라스베이거스에서는 한국에서 입을 수 없는 과감한 옷을 입으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또한 그랜드 캐년, 자이언 캐년, 엔탈롭 캐년 등 한국엔 없는 웅장한 자연을 보면서 숨이 턱 막혔던 추억들도 있다. 인도 친구가 운영하는 사진 동아리에 들어가서 모델로 활동을 (1번) 했으며 50불 정도의 수고료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지만, 나는 아직 하루하루를 이 추억으로 버티고 있다. 그때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연고도 없이 어떻게 지내야 하나 막막했는데, 한국에 돌아올 때 즈음에는 회사 사람들이 롤링페이퍼를 써주었고, 동네 친구들이나 교회 친구들, 홈스테이 하던 이모/이모부 등 모두가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해주었다.


내가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 쑥스럽고 감격스럽기도 했었고, 내가 왜 YGG 때 영어로 말하는 걸 그렇게 부끄러워했을까 후회되었다. 외국에 나와보니 나보다 영어 더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냥 콩글리쉬로든 바디랭귀지로든 어떻게든 말은 통했다. 하나하나 목표했던 것들을 해내며 자존감, 자신감도 올라갔다. 제일 좋았던 시간은 어느 날 어떤 강가를 따라 혼자 걷고 있었는데 그때 혼자 중얼중얼 거리며 내가 나랑 대화했던 시간이었다.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내가 지금 정말 행복하다"라는 류의 대화였을 거다. 계획이 틀어지면 극도의 예민함을 느끼는 나에게 시카고에서의 2시간 비행기 연착은 엄청난 스트레스였지만, 계획도 수정하고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마인드를 바꾸며 나름의 융통성도 기른 것 같다.


5. 24~25살, 금융권 취업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취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월가를 여행했을 때 우연찮게 스타벅스에 들어갔는데 멋진 직장인이 노트북을 켜고, 헤드셋을 끼고, 이상한 그래프 화면을 보고 있는 게 멋있었다. 그래서 금융인이 되기로 했다.라고 하면 조금 과장이다. 미국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행복하려면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돈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곳이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러한 시장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곳은 금융권이라고 판단했다.


마음을 먹고 서류를 넣었을 땐 처참했다.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도 당연할 것이 금융 자격증이나 경험이 하나도 없이 지원한다는 것은 맨땅에 헤딩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학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4학년 1학기에 금융 자격증을 하나 땄다. 그리고 미국 인턴 경험을 덧붙여서 증권사 인턴에 지원하게 되었고, 또 운이 좋게 붙었다. 증권사 인턴으로서의 업무도 착실히 하고, 금융 취업 컨설팅을 해주는 곳에 등록해서 현업자의 경험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인턴 하는 동안 CFA Lv.1을 땄다. 2학기에 서류를 넣었는데 합격률이 이전보다 확연히 높아졌다. 그중 채용 절차가 가장 짧았던 지금 회사에 몸 담게 되었다.


제목의 '연기'와 '금융권'이라는 단어만 보면 전혀 다른 무드의 단어인 것 같다. 하지만 내 1년의 키워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게 그냥 나라는 사람이 생기게 된 과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이 비단 취업에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라, 앞으로의 인생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떻게 풀어나갈지 솔루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년의 키워드를 만들었던 것처럼 작은 목표라도 설정하며 살아갈 것이다. 목표는 곧 내가 하고 싶은 것일 거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계획을 짤 것이다. 계획을 짠다면 바로 실행할 거란 걸 알기 때문에 몸과 맘이 가는 대로 하면 된다. 사실 이 브런치도 앞으로의 내 여정을 기록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는 회사만의 얘기가 아니라,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며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경험을 많이 기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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