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나라 by H. G. Wells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과연 애꾸눈은 왕이 될 수 있을까.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말은 그럴듯하다. ‘그렇지, 그가 왕이 되지 않으면 누가 되겠어?’ 그러나 H. G. Wells는 그의 단편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모두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루는 사회에서 ‘볼 수 있다’라는 말은 없는 말이고, 환상이며,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이었다. 특권이 아니라, 오히려 쓸모없는 능력이자, 결함 있는 존재로 취급당했고, 마지막엔 그들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는 수술을 받을 것을 제안받았다.
SF 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엔 사회적 통찰을 담고 있다. 다수가 공유하는 현실이 곧 진실이 되는 세계,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방식에 이미 익숙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도 있고, 다수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오답을 말할 때 개인이 자신의 지식과 다른 틀린 답을 따르는 경향을 증명한 '솔로몬 애쉬의 선분 실험(동조 현상 실험)'의 결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확신은 이리도 얇은 것이다.
누네스도 그랬다. 처음에는 저항했고, 싸웠으며, 자신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그들의 왕이 될 수 있도록 판도를 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힘을 합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에게 맞서며, 서서히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그 나라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고,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순응은 언제나 그렇게 찾아온다.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타협들이 쌓이면서. 그러나 그들이 수술을 제안했을 때, 누네스는 떠나기로 결정한다. 볼 수 있는 눈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세계에 남는 것은, 더 이상 순응이 아니라 소멸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사회에 순응하고 사는 사람과, 도전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콜린 윌슨은 이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명명했다. 일반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너무 많이 보는 그들은, 다른 시선을 갖고, 남들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을 가진 자처럼, 그 시선은 따로 축복이 아니라 고독의 원천이 된다.
어쩌면 의아할지도 모른다. 내가 분명히 명확히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맞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내 생각이 바뀔까? 그러나 과연, 같은 상황에서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그곳, 눈먼 자들의 나라에 남기로 결정할까? 아니면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할까? 우리는 눈먼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을 떠나는 것도 또 하나의 용기이자,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H. G. Wells는 가히 SF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타임머신, 우주전쟁, 투명인간과 같은 그의 소설은 향후 다양한 작가들에게 영감이 되어 주었고, 지금 나오는 모든 SF의 기원은 Wells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었던 아웃사이더였고, 그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쏟아내어 후대에 영향력을 떨쳤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각은 어떤가? 남들과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독특한 당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저 조용히 튀고 싶지 않아서 자신만의 세계를 감추어두고 눈먼 자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했다면, 결정해야 한다.
그대로 머무를 것인지, 눈먼 자들의 나라를 떠나 아웃사이더의 여정을 떠날 것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