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과한 ‘자극’
‘그분이 오셨다.’ PD들끼리 편집을 하다 보면 가끔 하는 말이다. 전화나 카톡에서 자유롭고, 심지어 동료가 말도 걸지 않을 때, 가만히 편집 과정에 집중하게 되면 편집 능력이 상당히 높아지는 때가 있다. 스토리 흐름이 내가 봐도 무척 좋고, 컷과 컷이 미학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면서, 깔아 놓은 효과음과 편집 장난질이 이 상황을 너무너무 웃기게 해 줬을 때! (은어로 ‘니쥬’가 딱딱 들어가 있고 ‘도다바다’가 이루어지다가 ‘오도시’ 터뜨릴 때ㅋ) 그 흐름을 만드는 여정에 안착한 듯한 순간, 우리는 그럴 때 ‘그분이 오셨다’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그때 fMRI를 찍어보면 제작자의 뇌가 온갖 곳에서 반짝일 것 같은데, 창의적으로 스토리라인을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상상력) 이를 손기술로 실현해야 하고(동작), 중간중간 비판적으로 점검도 해줘야(비판적 사고 능력) 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도 대학 방송국 시절에 느꼈던 그러한 순간이 좋아 제작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분이 온 순간’과 같은 초초고도하이 상태는 단점이 있었다. 바로 온 정신을 너무 또렷하게 만들어, ‘이완’의 상태와는 멀게 만든다는 것. 거의 밤 12시가 가까운 시각에까지 음악에 맞추어 기깎기(편집 호흡을 보기 좋게 조절하는 것) 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흥분 상태로 변하고 만다. 머릿속엔 자꾸 음악이 맴돌고, 내가 붙인 편집본을 토대로 더 큰 상상이 시작된다. 그러다 보니 편집 후 귀가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잠이 들지 않는다.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 너무 좋아서 잠에 들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이런 각성 상태 때문에 잠을 못 이룬 날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 아무리 편집을 하루종일 한 날이더라도 11시쯤 되면 하품이 나오고 자고 싶어 진다. 잠에 대한 욕구가 편집으로 인한 흥분을 대부분 이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각성 상태는 알게 모르게 나의 뇌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자극에 민감해진다거나 작은 입력에도 상상이 훨씬 빨라지는 방식으로 말이다. (실제로 PD들은 실생활에서의 스토리텔링이 빠른 편이다) 그래서 편안한 상태의 뇌와는 조금씩 멀어진 게 아닌가 싶다.
다만, 만약 이랬더라면 어떨까? 밤늦은 시각까지 편집을 하지 않았다면. 언제나 9시 출근과 6시 퇴근이 지켜졌다면. 적어도 편집 이후의 각성 상태가 조금 가라앉은 상태에서 잠에 들지 않았을까. 스위트홈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가족과 대화하고, 책을 읽다 스르르 자는 방식으로. 하지만 이전 글에서도 써두었듯이 빡세고 고된 제작 환경에서 6시 칼퇴는 불. 가. 능. 하. 다. 나는 자체체작 프로그램에 들어갔을 때, 초기 기획 단계가 아닌 이상 그런 시간에 퇴근해 본 경험이 아예 없다. 결국 제작자로서의 업무는 업무 자체의 특성(시청각적 자극으로 인한 각성)도, 환경적 특성(늦퇴)도 ‘이완’ 혹은 ‘숙면’이라는 단어와 친하지 않다는 게다.
적어보니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해결책으로 생각나는 건 각성 - 이완의 사이클을 개인에게 잘 맞게 가져가는 방식이다. 열심히 일해서 진이 빠졌을 때 적절하게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가선 생각을 자연스레 멈추고 꿀잠을 자는 생활 습관. 충분히 이완할 만한 시간. 피디 스스로 이 사이클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고 사내, 팀 분위기 형성을 통해서도 같이 이루어야 한다. 남의 일이 어떻든 ‘자기 일이 끝나면 퇴근한다’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 비효율적인 업무를 효율적으로 어떻게든 바꾸는 노력. 이미 사회 분위기가 변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더 정착되지 않을까?
제작자로서 ‘그분이 온 순간’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이를 오래오래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우린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봉준호 감독님도 ‘기생충’을 찍을 때 52시간 근로 문화를 지켰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와는 거리가 먼 거장의 이야기이지만, 그런 방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