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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강맨 Oct 28. 2023

그녀가 잠을 못 자는 이유 01

불규칙한 생활 습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제때에 밥 먹기 등 규칙적인 생활습관이 건강을 지킨다는 말은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론 요즘은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을 나눠 각자 생활 패턴에 맞게 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규칙성’은 담겨있다) 나 역시도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학교에서 짜진 시간표에 따라 삶을 살았기에 반강제적으로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시험기간 때도 밤새우는 건 크게 좋아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다만 나이가 먹고 대학교에 올라가니, 조모임과 동아리 활동에 치여 학기 중에는 꼭 한 번 ‘불규칙한 일상(예를 들어 새벽 4시 이후 취침)’을 살아내는 기간이 있었다. 나는 이것이 싫었다. 그리고 이런 힘든 일상은 취뽀를 통해 극복! 되는 줄 알았다. 회사에 들어가서는 일 하나만 되지, 다양한 조모임과 스펙 관리 등 자잘한 압박은 없을 것 아닌가?


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는가

나의 환상은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대. 박. 살이 났다. ‘일만 하면 된다’란 가정에서 ‘일’이란 건 정말 다이내믹하고 커다랗고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복장 터지게 하는 것이었다. ‘직장인이 되면 더 나아질 거야’라는 환상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고, 게다가 나의 직업은 더욱더 규칙적인 삶과 멀어져 있는 직업이었다. 조연출 시절엔 해외에서 며칠간 하루 네 시간씩만 자며 FD 업무(라고 하고 막노동이라 쓴다…)를 봐야 했고, 제작에서 그나마 쉽다 하는 프로를 맡을 때도 일주일에 3일 밤을 새우고 - 3일 쉬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제작 업무는 강도 높은 노동 때문에도 힘들지만, 생활이 ‘불규칙적, 변칙적’이라는 사실이 가장 힘들었다.

 

왜 제작 업무는 불규칙적이어야만 할까?


‘원래 일이 많다’라는 답변을 내놓기엔, 어쩐지 마뜩잖다. 업무가 많다면 이를 잘 나누어서 규칙적으로 하면 되기 때문이다. 요즘 다른 직종들도 얼마든지 일은 많기에, 일할 땐 일하되 쉴 땐 푹 쉴 수 있는 PD 특성상 ‘일하는 총 시간’으로만 따지면 타 직종이 더 많이 일할 수도 있다. ‘일의 빡셈’이 아니라 ‘불규칙, 변칙적’이라는 특성을 제대로 알기 위해 제작 업무의 흐름을 간략하게 써봤다.

 

가장 빡셀 때(기획 단계가 지나고 촬영 – 편집이 반복되는 시간) 기준의 업무 방식:


1) 여러 부푼 꿈을 안고 촬영에 들어간다. 보통 한 번에 12시간 이상이다.


2) 오랜만의 촬영에 힘이 드는군! 싱크를 맡겨 놓고 하루이틀 쉰다.


3) 리프레시가 된 상태로 편집 업무를 시작한다. 시사 날짜 전까지 틈틈이 해서 절대 밤을 새우지 않으며 편집하겠다고 다짐한다.


4) 열심히 편집만 하던 나에게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무언가를 부탁해 둔 후배가 내 말을 잘못 알아들어 수습해야 한다거나, 출연진에게 문제가 생겼다거나, 작가님과 업무 배분이 잘 안 되어서 내가 하게 생겼다거나 선배가 서류를 부탁하셨다거나…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거지만, 어쨌든 나의 편집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5) 꾸역꾸역 완성한 나의 편집본! 그런데 시사 전날 확인하니 어라…? 내가 구상하던 것과 다르다. 이 퀄리티로 내일 시사를 하느니 한강물에 뛰어드는 게 낫겠다. 딱 오늘만! 밤을 새운다.


6) 시사에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의견이 나온다. 우왓 수정이 많을 것 같다.

6-1) 시사평이 나름 좋다. 수정 빨리 하고 쉬어야지.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 “다 끝냈어? 그럼 이것 좀 해줄래?”


7) 우여곡절 끝에 나의 편집본을 종편 감독님(디자인)에게 넘겨드렸다. 이제 쉬어야지! (진짜 좀 쉰다)


8) 약속하던 시간에 종편본이 오질 않는다.


9) 원래 생각한 시간보다 n시간이 지나 종편본을 확인한다! 집에도 다녀오지 못하고 꾸역꾸역 시간을 축내다가 확인한다. 그런데, 퀄리티가 왜 이러지? 다시 부탁드린다.


10) 다시 확인해도 미세하게 걸리는 것이 있다. 다시 부탁드린다.


11) 이 와중에 촬영 날짜가 돌아와서 준비를 한다. 1번 때보다 열정과 아이디어가 고갈된 상태이다.


12) 1-11을 반복하며 체력이 고갈되고, 신선한 편집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고 하던 대로 편집한다. 편집본이 조금씩 정형화되며 업무 효율이 올라간다. 그러나, 시사에서 ‘신선한 의견’이 나오면 고쳐야 한다(당연하다). 이 와중에도 사고는 계속 터진다. 결국 여러 번 일하면서 얻게 되는 효율성으로도 쌓이는 피로를 다 막을 수 없다.


좀100. 제작 회사에 들어갔다 삶을 잃어버리는(?) 내용의 일본 애니메이션

 

글을 쓰다 보니 왠지 모르게 폭로성(?) 글이 되는 것 같지만, 이 글은 그런 의도가 아니다. 이렇게 업무 프로세스를 촘촘히 들여다봐야만 ‘불규칙성’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 적고 보니, ‘일이 원래 많다’는 걸 빼고 포인트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애초에 돌발 변수가 많은 산업이라는 점. 한 TV 방송 프로그램에 얽힌 사람이 너무 많고 규모가 크다 보니 각 부분에서 돌발 변수가 무조건 생기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총책임자인 PD가 어떻게든 처리를 하거나, 처리하지 않더라도 알고 있어야만 한다.


두 번째는 제작 업무 자체가 ‘한계가 없고 정성적’이라는 것. 예를 들어, 시사 전날 편집을 이미 마쳤음에도 직접 본 나 자신이 퀄리티가 마음에 들지 않다고 수정하는 상황이나, 종편 감독님의 작품을 또 수정하는 상황을 말한다. 다른 직종처럼 서류를 작성하거나 숫자를 두들기는 등 ‘정량성’이 확보된 곳은 업무의 끝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지만, 영상을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자기가 하는 곳까지가 끝’이기 때문에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PD들도 작가진도 종편 감독님들도 ‘퀄리티’를 위해 무한 노동을 한다. 빼어난 프로그램, 빼어난 편집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예술성이 조금 가미되었다는 점이 바로 이렇게 작용한다.


결국, 불규칙적 생활은 퀄리티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인 것만 같다. 일단 해결해야 하는 일이 엄청 엄청 엄청 많고, 이를 다 해결한 후에 편집을 하다 보면 끝이 어디인가 알 수 없다. 자연스레 ‘규칙성’이란 딱딱한 단어는 까먹고 만다. (퀄리티가 중요하지 뭔 놈의 52시간이야!) 그러니 자연스레 건강, 숙면과는 멀어질 수밖에.


물론 요즘은 제작 환경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고, 레귤러 프로그램의 경우 업무 분배가 잘 되어 있어 규칙적으로 지낼 수도 있다. 열심히 하는 만큼 성과라는 뽕을 맞기도 하는 매력적인 직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돔황챠!’ 같은 말은 잠시 넣어두고, 방법을 모색해 보자. 그래서 준비한 다음 글의 주제는 ‘과한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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