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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중현 Jul 18. 2020

제2의 진주만 공습과 토익 695점

독학으로 영어 공부한 실력만 믿고 국제공조 수사에 뛰어들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곧바로 군입대  전역과 동시에 졸업과 취업이 목표였던 나에게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서 다녀오는 해외 유학은 꿈도   없었. 해외 유학은 여건상  간다고 하더라도 전역  3학년 복학하고 나서  번쯤은 토익 시험을 봤을법한데 스펙의 기본 중의 기본인 토익 시험 한번 보지 않고 도대체 무슨 깡으로 취업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다.

공인된 토익 시험 자격증 하나도 없이 영어에 대해서 검증된 바 없었지만 사이버범죄 수사팀에 근무하기 전 연천 교통사고 조사계에 6년간 근무 당시 영어가 필요한 시기가 예고 없이 그것도 꽤 많이 찾아왔다.

 

연천은 경기도 최북단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전곡읍 은대리와 군남면 일대는 한국과 미군 연합으로 장기간 합동 군사 훈련 작전이  오랜 기간 진행된다.  기갑부대의 전차 훈련과 도하훈련이 한국과 연합으로 여름과 겨울에 4개월가량 진행하다 보니 훈련 기간  베이스캠프를 기점으로 이동하는 훈련 차량의 규모가 연천 아니면   없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연천과 강원도를 잇는 3번 국도를 점령한 채 1km가량 이어지는 장갑차, 탱크, 도하 전차의 행렬과 그 뒤를 호송하는 순찰차 및 헌병대 차량의 행렬은 훈련 기간 내내 이어지고 가끔 집에서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매일 타고 다녔던 3번 국도에 전날 훈련으로 지나간 전차와 장갑차 무한궤도의 흔적이 도로상에 그대로 남아 있는 흔적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문제는 한미 연합 훈련이 이어지는 기간 동안 상반기에는 농번기와 맞물려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겨울에는 도로 여건 때문에 대형 사고가 많이 접수된다. 미군이 운전하던 탱크, 장갑차, 도하 장갑차, 훈련 중이 아니더라도 미군이나 미군부대 소속 미국인이 운전하는 일반 차량과 내국인이 운전하던 차량과 교통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인명 피해가 있던 없던 반드시 SOFA 규정을 준수하면서 경찰이 개입하여 사고 처리를 해야만 한다.

 

실례로 훈련 기간 중 미군이 운전하던 전차가 며칠간의 밤샘 훈련으로 인해 운전자의 졸음운전으로 신호등이 설치된 교차로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내국인 피해자가 운전하던 차량을 뒤에서 추돌한 사고가 접수되었다. 미군과 교통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상대 차량 운전자는 일단 의사소통부터 어려워하기 때문에 112 신고를 하게 되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지구대 파출소 경찰관은 SOFA 사건은 경찰서 교통사고 조사계에 반드시 인계를 해야 하는 절차로 사고 조사계 담당자는 현장에 출동한다.

이때부터 교통사고 조사계 담당자가 영어가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초동 조치 때 필요한 진술이나 증거가 확보가 되느냐 안되느냐가 결정된다. 당시 교통사고 조사계에 근무할 때는 지금처럼 차량에 블랙박스가 보편화되기 전 시절이어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신호위반 교통사고에서 두 차량 운전자 모두 신호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때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나 지방 경찰청에 설치되어 있는 거짓말 탐지기 검사에 의뢰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블랙박스가 흔하지 않던 시절 미군이 운전하던 차량에는 당연히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보니 상대 차량에도 블랙박스가 없다면 충돌지점과 충격 부분 그리고 사고 당사자와 주변 차량 운전자의 진술로 종합해서 가해차량 운전자와 피해 차량 운전자를 가려야만 한다.

 

한 번은 미군이 운전하던 험비 차량과 일반 승용차량 간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파출소 직원분의 전화를 받자마자 사고 장소 확인부터 필요했다.

“어디로 가면 되는가요?”

“여기 구석기 박물관 들어가기 초입에 설치된 은대리 교차로 삼거리입니다!”

사고 장소는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 교차로 삼거리여서 두 운전자가 신호위반을 부인하면 장기적으로 사건을 끌고 가야 할 가능성이 높아져 무엇보다 사고 직후 거짓말을 할 정신적 여유가 없을 때 현장 용어로 생각이 오염되기 전 최대한 진술과 증거를 확보해야만 했다.

 

현장에서 교통사고 초동조치는 사진 촬영과 각 차량 운전자들의 인적사항 확인 및 음주운전 여부를 위한 음주 감지기 테스트 그리고 운전 면허증이 있는지 여부를 파악하는 걸로 시작한다. 초동 조치가 끝나면 각 차량 운전자에게 진술서를 나눠주고 사고 전부터 사고 직후까지의 상황을 간단하게 작성하도록 시간을 준다. 그런데 미군 험비 차량 운전자는 항상 교통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제일 먼저 소속 군부대 미군 헌병과 한국인 통역 군인 카투사를 호출하게 되고 간단한 질문조차라도 미군 헌병이 1차 조사를 마치고 나서야 사고 조사관이 그 후에 운전자 대상으로 조사가 가능하다는 걸 몇 년간의 사고 조사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 헌병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현장에 가야만 했다.

사고 직후 다른 의도로 생각이 오염되기 전 최대한 진술을 들어야만 사고 현장 상황과 상대 차량 운전자의 진술과 대조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미군 헌병대보다 현장에 늦게 도착하면 운전자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을뿐더러 헌병대를 통해 미군부대에 정식 조사 일정을 통보하고 조사 일정을 조율한 뒤에 미군 험비 차량 운전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해야 한다. 조사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미 군부대 관계자 그리고 카투사의 참여하에 이루어지는 조사는 사고 직후 당사자로부터 중요 쟁점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만약 운전자가 거짓으로 진술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도 다행히 미군 헌병보다 먼저 도착해서  차량 운전자 대상으로 신호위반 여부에 대한 질문을  수가 있었다.

“교차로 진입 전 전방에 신호등은 확인하신 건가요?”

한국인 운전자 상대로 먼저 질문을 시작했다.

“저는 신호를 보고 진입했고 미군이 신호를 위반했습니다. 그리고 사고 직후 미군 운전자가 차에서 내릴 때 운전석 밑에 맥주로 보이는 캔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순간 미군 험비 차량으로 다가가서 운전석 밑에 떨어져 있는 캔을 들어서 확인해 보니 “monster”라는 에너지 음료였다. 그래도 술 냄새가 났다는 상대방 운전자의 진술을 확인해 봐야 했기에 미군 차량 운전자에게 본격적으로 질문을 이어 갔다.

“You Drunk? I mean DUI(Drive Under Influence):음주(약물운전 포함)운전 했는가요?”  

덴젤워싱턴, 에단호크 주연의 영화 트레이닝데이(training  day)에서 두 주인공이 커피숖에서 대화를 나누는 대사중에 음주운전 차량을 세웠다는 DUI 대화를 기억하고 현장에서 한번 써 먹어야겠다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상황이 맞아 떨어졌다.

“Absolutely not!(절대 아닙니다!)”

나중에 DUI는 약물에 취한 상태의 운전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주취운전의 개념이란걸 알게 되었지만 미군은 음주운전은 아니라고 답변 했다.

이어서 에너지 음료로 추정되는 캔을 보이면서 물어봤다.

“Is this yours?(당신 건가요?)”

“Yeah, it’s just energy drink!(예, 그건 그냥 에너지 음료입니다!)”

“Ok, Let me check Drunk Driving.  And you must cooperate!(좋아요! 음주운전을 확인할 건데 협조해야만 합니다!)”

“Sure!(당연하죠!)”

파출소 직원이 소지하고 있던 음주 감지기를 넘겨받아 미군 운전자의 입에 갖다 대면서 바람을 불어넣으라고 설명했다.

“Blow “Hoo~~~”into this hole!(음주감지기 구멍에 후~~~하고 바람을 불어 넣으세요!)”

먼저 시범을 보여주고 감지기 구멍에 바람을 넣으라고 하니 곧바로 바람을 불어넣었고 음주는 감지되지 않았다.

음주 운전은 두 차량 운전자 모두 해당사항 없었고 운전면허도 소지하고 있었으며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신호위반 여부 확인이 남았다.

“Just Before you entering 3 corners street, did you check the signal lamp?(삼거리 교차로 진입전에 전방에 있는 신호등은 확인하였는가요?)”

“I’m not sure!(확실하지가 않습니다!)”

확실하지 않다는 말은 미군이 신호위반을 했다는 말이다.

“You mean, you didn’t check the signal lamp before entering intersection, right?(그말은, 교차로 진입전에 신호등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Yes.(예)”

“ The other driver said, he entered intersection at a green light…But you didn’t check the signal lamp, so the cause of this traffic accident is signal violation…You admit signal violation?(상대방 운전자가 말하기를, 그는 교차로 진입때 전방 신호등이 녹색불이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당신은 신호등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네요. 그렇다면 당신이 신호위반을 한게 됩니다. 인정하는가요?)”

“Yes(예)”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신호를 위반했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려 현장에서의 사고 처리는 마음 가볍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본조사와 사고 원인까지 모두 마치고 나서도 한 참 지난 뒤에 미군 헌병이 도착했고 미군 헌병에게 기초 진술을 들었음을 확인시켜 준 후 며칠 후 경찰서로 관계자들과 함께 정식으로 출석하도록 했다. 미군을 교통사고 피의자로 입건 한 뒤 조사를 마치고 의정부 지방검찰청으로 사건 관련 기록을 모두 넘겨주었다.

그렇게 되면 SOFA 사건으로 분류가 되고 피해자인 한국인 차량 운전자는 사고로 발생한 인적 피해와 물적 피해는 본인이 가입되어 있는 보험으로 처리를 하고 피해 금액만큼 미군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게 된다.

 

그렇게 교통사고 조사계 근무하는 6년 동안 미군 차량 운전자의 조사 및 통역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옆 부서인 형사팀과 강력팀에서도 외국인 근로자가 밀집해 있는 청산 공단에서 작업 중 고압 전선에 감전되어 사망한 변사자의 유가족 조사와 외국인과 국내 업주 간 임금 체불 때문에 발생한 폭행 사건 통역까지 담당하면서 비공식 경찰서 통역인이 되었다.

공식으로 등록된 통역인이 아니다 보니 모두 통역비 없이 직접 조사를 하거나 사건 담당 형사의 통역에 참여했지만 간혹 잘못된 통역을 하게 되면 검찰에 불려 가서 다시 증언을 해야 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사 과정은 진술 녹화실에서 영상으로 남겨 CD로 사건 기록에 첨부했고 통역에 대한 수사 보고서도 직접 작성해 반드시 첨부해 두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 공부에 대한 갈증이 저절로 생겨나게 되었고 경철청에서 직원들 대상으로 무료로 제공해주는 온라인 영어 수업 혜택이 상당히 많아 틈나는 대로 인강으로 영어 수업도 병행했다.

대학교 때 토익시험 한번 쳐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뒤늦게 영어의 필요성을 느껴 단 한 번도 어학연수를 가보지는 않았지만 직장 생활 틈틈이 문법은 온라인으로 공부를 하고 미군 SOFA 사건 때마다 몸으로 부딪히는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곧바로 시험에 도전했다.


순수 독학으로 취득한 토익점수.


900점 이상의 토익 점수는 아무 필요가 없었기에 영어에 대한 감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문법 공부를 더해서 영어 점수를 올리고 싶은 욕심보다는 기회만 되면 더 많은 외국인 조사에 참여해 머릿속에서 입으로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고 싶었다.   


연천에서 지방 경찰청으로 발령받고 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다른 팀원이 관내 은행에 들러서 외근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수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막내에게 팀장이 “김형사, 오늘 은행에 다녀온 거 서류 정리하고 나서 경찰청 사이버안전국에 사건 진행 상황 보고해야 될 거야. 아침에 전화 왔었어!”라고 업무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내는 “서류가 전부 영어라 갑갑한데요, 뭐 진행된 것도 없고… "

경찰청 사이버안전국에서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을 정도면 사건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언론에서 보도가 된 사건이거나 아니면 뭔가 중요한 사건인 것 같아 서류를 좀 봐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수사보고서 때문에 고민하던 막내로부터 넘겨받은 서류는 채 10장이 되지 않았지만 막내가 작성한 수사보고서 1-2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다.


From NCA(National Crime Agency, United Kingdom)

영국 범죄 수사국에서 서울 미근동 경찰청 사이버안전국에 공식으로 사건을 수사해 달라는 국제공조 서류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영국에서도 이렇게 한국으로 수사를 해달라고 요청하는구나!’

국제 공조 서류를 처음보다 보니 신기하기도 했고 곧바로 사건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영국에 있는 선박 접안설비 제작회사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영국 회사 대표가 돈을 다른 계좌로 송금하면서 피해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사건이지?’

‘이게 사이버 사건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사기사건이라고 해서 전부 사이버범죄 수사대에서 처리하는 게 아니라 업무 분장에 따라 사이버범죄 수사 업무에 포함되어야 처리하는 게 맞는데 무슨 사건인지 감이 전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서류 하단에  'E-mail hacking’ 이메일 해킹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영국 접안설비 제작회사의 대표 이메일이 해킹되면서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는 내용으로 지금까지 형사 생활하면서 처음 접해본 종류의 서류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리고 뭔가 이 사건의 매력에 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무슨 사건인지 내용도 모르겠고 앞으로 뭐부터 해야 할지 방법도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서류는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남들이 외면하는 사건에 올인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며칠 전 마침 사이버범죄 예방교육 자료를 만들다가 한 외신 기사의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동시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The Next Pearl Harbor That We Confront Could Very Well Be A Cyber-Attack…”

-Leon Panetta, Former CIA Director Senate Hearing.


"우리가 직면할 다음 진주만 공습은 사이버 공격이 될 것이다.”

-파네타 전 CIA 국장.


우연히 접하게 된 외신 보도자료. 출처:구글 이미지 검색



오로지 경찰서에서 몸으로 부딪혔던 영어 회화 실력과 인강으로 배운 영어로 취득한 토익 자격증 그나마 유효 기간도 지나버린 영어실력 하나만 믿고 영국 범죄수사국에서 들어온 사건을 가지고 와야만 했다.


“팀장님 이 사건 저한테 배당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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