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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May 02. 2021

세상을 바꾸는 건 무엇인가

[영화 리뷰]더 스파이 The Courier(2020)

미국과 소련이 한창 핵무기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던 1960년대. 소련의 최고지도자 흐루시초프는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고 한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핵전쟁도 불사하려 하고 그로 인해 핵전쟁의 공포가 전 세계를 뒤덮는다. 소련의 '올레그' 대령(메랍 니니트쩨 분)은 흐루시초프의 즉흥적이고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을 불안해하고 영국의 MI6와 미국의 CIA에 소련의 기밀문서를 넘기려고 한다. 두 기관은 소련에 건너가서 '올레그' 대령의 기밀을 몰래 운반해 올 적임자로 사업가 '그레빌 윈'(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을 고용한다. 사업상의 방문으로 위장하여 소련에 들어간 '그레빌'은 '올레그' 대령을 만나 그가 건네는 기밀들을 받고서 CIA와 MI6에 건네고 그런 만남이 계속될수록 '그레빌'은 '올레그'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진다.






역사학을 좋아한 나는 대학에 처음 진학해서 민중사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까지 국정교과서로만 국사와 세계사를 배웠던 나에게 민중사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승자나 권력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역사만을 배웠으니 역사 발전의 기저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민중들이 주역일 수 있다는 관점이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었으랴.


몇 년 전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은 그의 저서 <나무야 나무야>에서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라고 하셨다. 진실로 옳은 말이다. 조국의 해방을 진정으로 믿고 끝까지 독립을 위해 자신을 헌신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 덕분에 우리는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 덕분에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민주주의 선진국이 되었다. 강고하고 폭압적인 일제와 군사 독재 정권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얼핏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무수히 있었기에 역사는 발전해 온 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냉전 시대에 소련 내부의 스파이 중에서 압도적으로 방대한 정보를 서방에 빼돌린 '올레그' 대령과 그 정보를 서방의 정보기관에 전달한 영국인 사업가 '그레빌 윈'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가 아무리 실화를 기반으로 하였더라도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 이 영화가 실제 역사를 100% 그대로 담아낸다고는 볼 수 없다. 거기에는 분명히 영화적 허구가 들어가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이기 때문에 서방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음은 명약관화하다. 그렇기에 자국의 군사 기밀을 뻬돌려 적국에 넘긴 '올레그'는 영화 속에서 세계의 평화라는 투철한 신념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러시아도 '올레그'를 올바른 신념을 가진 인물로 생각할까?


애초부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러한 의구심이 마음에 떠올랐다. 내가 실존 인물로서 '올레그'와 '그레빌'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전문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기 힘든 마당에 영화 속의 역사를 실제 사실로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레그'가 '그레빌'의 가족들과 식사하는 장면에서 '그레빌'의 아들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에 오래남았다.


악수하는 '올레그' 대령(왼쪽)과 '그레빌 윈'
"우린 겨우 두 사람이지만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 거야."


평범한 사람들의 신념과 양심에 의한 행동들이 우리 사회에 어떠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는지 우리는 무수히 예를 들 수 있다. 실제 '올레그'가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행동했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영화 속의 저 대사만큼은 정말 마음을 울리는 한 마디였다.





이 영화는 첩보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기존의 첩보 스릴러 영화들보다 느슨하다. 냉전 시기스파이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할까. 도미닉 쿡 감독은 서스펜스 넘치는 첩보 스릴러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 '올레그'와 '그레빌'의 인간적인 유대에 초점을 맞추어 연출을 한다. 그렇기에 살짝 심심하기까지 한 중반부를 지나면 후반부에서는 서로를 신뢰하면서 고난을 견뎌내려는 '그레빌'과 '올레그'를 연기한 배우들의 사실적인 열연과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다.


게다가 우공이산이라는 어찌보면 뻔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잘 표현하는 영화이다. 돌이켜 보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한 1960년 4월의 학생과 시민들, 군사독재에 맞서다가 총탄에 쓰러져 간 1980년 5월 광주의 영령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한목소리로 외쳤던 전 국민들, 2016년 10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추위를 무릅쓰고 광장에 모였던 이름 없는 한 사람 한 사람, 그 외 역사책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던 수많은 '우공'들 덕분에 역사의 수레바퀴는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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