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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Apr 25. 2020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도서 리뷰]그래픽 노블 <왓치맨>




1. 시놉시스

1939년, 최초로 복면을 쓰고 활동하는 자경단 히어로인 후디드 저스티스(Hooded Justice)가 등장한 이후로, 그의 영향을 받아 신분을 숨기고 자경단 활동을 하는 히어로들은 최초의 슈퍼히어로 조직인 미닛멘(Minutemen)을 창설하고 범죄와 맞서 싸운다. 하지만 미닛멘의 멤버들 중 대부분은 불행한 말년을 맞는다. 그들의 뒤를 이어 활동하는 히어로 조직 크라임 버스터즈(Crime Busterds)의 멤버들은 자경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한 킨 법령 제정된 이후, 그 법령을 어기고 불법으로 활동하는 로어셰크(Rorschach)를 제외하고는, 신분을 공개하고 정부와 함께 일하거나--코미디언(Comedian), 닥터 맨해튼(Dr. Manhattan), 2대 실크 스펙터(Silk Spectre Jr)-- 자경 활동을 그만둔다--나이트 아울(Night Owl), 오지맨디아스(Ozymandias)--.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핵전쟁의 공포가 감도는 미국. 코미디언이 살해되고 이에 로어셰크는 마스크를 쓴 히어로들을 죽이려는 자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저지하고자 하나 그 와중에 밝혀지는 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2. 그래픽 노블의 특성


최근 실사 영화로 유명해진 마블과 DC의 슈퍼히어로 그래픽 노블은 단순히 재미있는 스토리와 통쾌한 액션 때문에 현재의 위상을 가진 것만은 아니다. 그래픽 노블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코믹스와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미국과 미국을 둘러싼 세계의 변화를 간파해서 슈퍼히어로 이야기에 녹여내는 점이다. 등장 초기만 하더라도 그저 인간을 뛰어넘는 단순한 슈퍼히어로 집단의 리더였던 프로페서 엑스와 그에 대적하는 빌런 집단의 리더인 매그니토라는 단순한 선악구도였던 엑스맨은 당시에 널리 퍼지고 있던 흑인 인권 운동 사조를 스토리 구성에 적극적으로 녹여내었다. 그리하여 인간과 공존하며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파 돌연변이 지도자인 프로페서 엑스와 인간을 증오하고 돌연변이의 우월함을 주장하며 인간과의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매그니토의 투쟁을 스토리의 중심 갈등으로 만들게 된다. 1960~70년대 흑인 인권 운동의 두 거두인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의 사상을 프로페서 엑스와 매그니토의 캐릭터에 담아내었던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 소위 PC(Political Correctness)가 대세인 최근에는 여성 히어로의 과도한 노출을 수정한다든지, 백인 남성이 아닌 여성, 유색인종 히어로를 대거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슈퍼히어로 장르는  시대의 흐름을 발빠르게 따라잡고 그 흐름을 이용한다. 따라서 그래픽 노블의 이면을 분석해 보면 당대 미국인들의 세계관과 미국 사회의 특성이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한 그래픽 노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이 ‘왓치맨’이다. ‘왓치맨’은 냉전의 공포가 전세계에 확산되던 1980년대 미국인들이 느끼던 핵전쟁의 공포를 잘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공공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막강한 힘을 자의적으로 휘두르는 존재가 있다면 어떤 위험이 따르게 되는지도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3. 핵전쟁의 공포

‘왓치맨’은 198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혹시 그 시절을 살았던 독자라면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둠스데이 클락(The Doomsday Clock), 지구종말시계라고 불리던 바로 그 시계 말이다. 자정을 가리키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그 시계는 요즘 젊은 세대는 대부분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80년대에는 과학자들이 분침을 몇 분으로 옮겼고 그래서 지구종말까지 얼마 정도 가까워졌는지 메인 뉴스에서 중요한 꼭지로 보도됐었다. 당시의 많은 문화 컨텐츠들은 핵전쟁과 그로 인해 멸망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인류를 소재로 했다. 혹성탈출 시리즈, 매드 맥스 시리즈, 터미네이터 시리즈,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등의 영화, 북두의 권, 백수왕 고라이온, 썸 오브 올 피어스, 은하영웅전설 등의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등이 핵전쟁을 소재로 한다. 요컨대 1980년대를 살았던 인류는 전쟁을 하지 않고 상대를 이기기 위해, 온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무기를 상대방보다 많이 갖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두 강대국 때문에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안고 살았다.

왓치맨도 당시의 이러한 정서를 작품 내에 충실히 반영한다. 이 작품 내에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가 바로 지구종말시계이다. 표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1시 57~58분 정도를 가리키고 있는 노란 바탕의 시계를. 실제로 벌어졌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해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핵전쟁으로 전 인류가 절멸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작품 내내 묘사된다. 실제로 마스크를 쓴 히어로를 살해하고 모든 사건을 꾸미는 흑막인 오지만디아스는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을 꾸민다.

작중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 중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는 존재는 닥터 맨하탄이다. 진성장 실험 금고 안에 실수로 갇히게 되면서 몸이 원자단위로 분해되어 사망하지만 되살아난 존재이다. 그는 작중에서 거의 신과 같은 능력을 보여준다. 역대 슈퍼히어로 만화에 나오는 어떤 히어로보다 막강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왜 하필 닥터 맨하탄일까? 최초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따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닥터 맨하탄은 핵무기를 은유한다. 작중에서 소련은 여러 차례에 걸친 미국의 굴욕적인 요구에도 닥터 맨하탄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른다는 언급이 있을 정도로 당시 미국의 막강한 핵 전력을 비유하는 존재이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핵 무기 사용과 함게 끝났다. 핵무기를 개발한 과학자들은 어쩌면 핵무기가 전쟁을 종결짓고 평화를 가져올 무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은 상대보다 더 많은 핵무기를 갖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고 그 결과로 인류는 언제든 전 인류가 몰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게 되었다. 닥터 맨하탄으로 상징되는 핵무기는 소련이 미국과 전쟁을 주저하게 만드는 존재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전쟁을 불러일으켜서 인류가 공명할 수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4. 자경의 자의성과 위험성

왜 하필 미국에 그 많은 슈퍼히어로들이 등장했고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가? 이 질문의 답은 미국의 역사와 관련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메리카 대륙 동부에 상륙한 백인들과 전 세계에서 금광을 바라고 미국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서부로 점점 진출하던 상황에서, 그들은 가혹한 환경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무서운 맹수들, 무장한 갱과 강도들, 땅을 빼앗기고 분노한 원주민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던 상황은 자연스럽게 자경의 전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슈퍼히어로를 소재로 한 그래픽 노블에 등장하는 수많은 히어로들이 바로 그러한 자경단이다. 법과 제도로 범죄와 불의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판단과 무력으로 자신들이 악으로 규정한 세력을 응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슈퍼히어로가 빌런을 응징할 때 선이 악을 이긴다는 통쾌함과 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현실세계에 자경단이 활동을 한다면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예를 들어 현재 전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N번방 사건의 범죄자들을 경찰이 아닌 자경단원이 개인적으로 찾아내서 응징한다고 가정해 보자. 들을 때야 후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런 권한을 그들에게 준 것인가? 어떤 행위가 불법인지 합법인지, 누가 정의인지 불의인지 판단할 권리를 자경단은 누구에게 얻은 것일까?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법과 시스템이 아니라 자의적 판단으로 다른 사회 구성원을 징벌할 수 있는 권리는 민주공화국에서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런 위험 때문에 자경은 민주화된 모든 국가에서 불법으로 규정된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여 배트맨과 같은 몇몇 슈퍼히어로는 작중에서 공권력에 쫓기는 범죄자로 묘사된다.

<왓치맨> 속에 등장하는 로어셰크는 바로 그러한 자경활동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자경 활동 초반에 로어셰크는 범죄자를 살려주기도 하는 자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다 유괴 당한 소녀를 구하러 들어간 범죄자의 집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유괴범이 소녀를 살해한 후에 시신을 토막내서 자신이 키우던 세퍼드 두 마리에게 먹이로 준 것을 보게 된다. 그 광경을 본 로어셰크는 세퍼드들을 중식도로 죽이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온 유괴범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인다. 소녀의 가족에게는 로어셰크의 행위가 너무나 고맙고 후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의 자의적 징벌 행위가 허용됐을 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워질지 생각해 보라. 그 유괴범은 로어셰크의 사적 폭력이 아니라 법률로써 징벌해야 한다. 비록 그 과정이 분통 터지게 답답하더라도 말이다. <왓치맨>은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그래픽 노블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근간이 된 자경의 전통을 비판, 풍자하고 있다. 거기다가 궁극적으로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한 힘이 견제 세력 없이 폭주할 경우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5. 총평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Who watches watchmen?”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
유베날리스라고 하는 로마 시대 시인의 풍자시에 나온 문장이다. 이 한 시구로 왓치맨의 주제 의식을 정의할 수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초월적 존재를 만들게 되면, 그 존재의 폭주는 막을 수 없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만든 핵무기가 도리어 우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공포를 안고 살게 된 인류의 상황과 자경 행위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왓치맨>은 슈퍼히어로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통해 잘 보여준다. 타임지가 선정한, 1923년 이후 최고의 영문 소설 100선에서 그래픽 노블로는 유일하게 이 작품이 포함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볼 때마다 새롭고 다른 측면이 보이는 작품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기준에서 <왓치맨>은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 책장을 펴 보면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만화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고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만화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생각해 볼 만한 거리가 많을 작품이다. 다만 일본의 역동적인 만화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미국의 그래픽 노블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소설인데 그림이 많은 소설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장르의 이름도 코믹스나 카툰이 아니라 그래픽 노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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