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기억
아침에 출근하니 카운터에는 쪽지가 하나 남겨져 있었다.
‘창가 쪽에 물이 새네요. 오후에 보수할 예정이니 오늘 창가 쪽 자리는 비워두세요.‘
이런, 어쩌지.
단골손님이 떠올랐다.
오전 10시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카페모카를 마시는 할아버지 단골이다.
나이는 칠십 중반쯤.
흰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그는 늘 같은 그레이 색 코트를 입고 다녔다.
왠지 파이프 담배와 중절모가 어울릴 듯한 멋쟁이! 할아버지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이곳에 들러 매일 똑같은 커피를 주문하고, 늘 창가자리에 앉는다.
커피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게 그의 루틴인 듯했다.
오전 10시.
문이 열리자,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역시 단골 할아버지였다.
- 카푸치노 한잔이요.
- 저 손님. 오늘은 창가자리에 문제가 있어서 다른 자리에 앉으셔야 되는데 괜찮으세요?
- 아 그런가요?
- 네. 물이 새서 오늘 보수한다고 해요.
- 그렇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할아버지는 창가가 보이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대체로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가는 시스템이지만, 손님이 없을 때 할아버지에게만은 직접 커피를 가져다 드리곤 한다.
우유거품이 가득 올라간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할아버지 앞에 내려놓았다.
- 커피 나왔습니다.
- 매번 직접 가져다주고 고마워요.
인사를 잊지 않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의 손끝에는 세월이 담긴 주름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한참 창밖을 보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 이 커피, 아내가 좋아했어요.
손을 멈추고 조용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밖을 응시한 채,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 분명 이곳도 좋아했을 텐데…
말끝을 흐리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 왜 같이 안 오시고.
-일 년 전에 먼저 갔어요. 당시에는 참 힘들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이곳을 보게 되었죠.
신혼 때 아내와 주말이면 들렀던 브런치 카페랑 너무 닮아서 놀랐었죠.
나도 모르게 들어와서 당연하게 카푸치노를 주문했어요.
한 모금 마시고는 와이프 생각이 나서 주책맞게 울고 말았죠.
그때 남자 사장님이 조용히 손수건과 함께 따뜻한 물 한 컵을 테이블에 놓아주더군요.
그날부터 이곳을 찾았죠.
여기서 창가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아내와 같이 있는 것 같아서 덜 외롭더라고요.
나지막하면서도 힘이 있는 그의 목소리에 주변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마치 창밖의 나무도 잔디도 귀를 쫑긋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듯 살아있는 모든 것이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듯 공간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표정이다.
카페 안은 시나몬 향이 짙게 퍼지고 있었다.
향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카푸치노를 마시며 아내와 함께 했던 그때로 잠시 여행을 하고 계시는 모양이다.
햇살이 카페 안까지 깊게 들어와 있다. 바람은 잔잔히 불어 나뭇잎이 살랑살랑 거린다.
여행하기 충분히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