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열심히 살았잖아.
“제가 아는 사람 전화가 맞나요?”
자다가 깨서 받은 전화의 첫 마디였다. 비몽 사몽한 중에도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 치고는 첫 인사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도 그런지 내가 대답을 않자 재차 내 이름을 확인했다.
“000씨 번호가 맞나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깨닫자 알면서 전화한 게 뻔한데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이제서야 상대가 누군지 인식이 되어 나도 어색하게 대답했다. 뭐라고 말해야 현재 여자친구도 있는 전남친의 나를 확인하는 물음에 매끄러운 답이 될지 생각하다가. 어… 맞을껄? 하고 삑사리를 내버렸다. 그 어색함에 여전하다는 대답과 함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와의 통화 시간은 약 10분정도였다. 뭐 거창한 얘기를 한건 아니고, 요새 사는 건 어떤지 잠깐 안부를 주고받다가, 느닷없이 자신의 승진이 누락됐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제서야 잠깐 씌였던 로맨스꾸러기의 렌즈가 벗겨졌다. 아, 이자식 푸념하려고 전화했구나. 뭐 그걸로 충격 받기에는 몇 주 전에 업데이트 된 그의 프로필 사진에 두 남녀가 다정하게 거울 샷을 찍고 있어서 모른척 하기 어렵기는 했다. 그치만 이 승진 누락 돼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굳이 연락 한지 1년이 다되어가는 전여친에게, 그것도 야심한 시간에 할 일인가 싶어 물어봤다.
네 여친한테는 왜 안 말하고?
걔는 잘 모른다. 그리고 우리 같이 열심히 살았잖아.
같이 열심히 살았으니 너는 내 마음을 이해할 거라는 전제가 그의 면책부가 된 모양이다. 대체 내가 그와 뭘 열심히 했는지 거의 전생처럼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보다가 그럼 나는 뭘 열심히 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잠깐 망설이다가 스페인어 학습지를 열심히 하지 않았냐고 되물음이 돌아왔다.
인간의 인식은 자신의 시선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의 동지애는 수험생활이며 취준을 열심히 하던 그가 나를 보았기에 형성된 것이 아닐까. 내가 그와 함께 열심히 살았다는 말에 의아함을 느꼈던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보다 헤어지고 나서야 ‘열심히’ 라는 부사의 뜻에 맞게 인생을 꾸렸다. 은연 중에 나는 그에게 내 인생을 의탁하고 있었고, 취준 공부를 하는 그의 옆에서 얼굴을 보되 방해하진 않겠다는 핑계로 스페인어를 공부했던 것 같다. 아마도 같이 공부해 주는 여자친구가 꽤나 고마웠을 것 같은데, 나로서는 현실적으로 같이 놀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와의 연애기간은 제법 길었는데, 인생에서 그 기간을 덜어내고 나니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연애시장에 날 내던지고 나니 나란 존재가 그동안 쳐맞은 감가상각이 계산되었다. 솔직하게 아까웠다. 그 때는 ‘슬픔을 잊기 위해 바쁘게 사는 나’에 취했다지만 돌이켜 보면 그 때의 나를 움직였던 것은 조급함이었다. 내가 나로서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 공백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서로가 서로의 비빌 언덕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니 그 비볐던 시간들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의 열심히 살았던 시간이나, 나의 뭐라도 해야지 했던 시간이나.
‘우리’가 끝나자 ‘같이’와 ‘열심히’는 이가 맞지 않아 덜그럭거렸다. 우리의 ‘같이’와 ‘열심히’는 그와 나의 인식의 양 끝에 위치한 듯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연락에 촉촉했던 마음이 식는 건 순식간이었다. 농담처럼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네 마음을 말하던지 안그러면 너 그렇게 살다가 자살할 것 같다는 저주 비슷한 걱정을 건넸다. 어색하게 시작했던 전화는 어색하게 끝났다. 그의 푸념을 10분 정도 들어주다가 앞으로는 연락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마무리했다. 그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수긍한 듯 하다. 승진 누락을 핑계삼아 연락 온 그 만큼이나 나도 찌질해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바닥으로 꺼지는 기분때문에 그날 밤 내내 열이 받았다. 결국 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차단했다. 내 프로필도 안보이게, 영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