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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정 Feb 15. 2022

고구마 박스에 담겨 온, 내일

계절이 오면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른다. 봄에는 딸기, 여름에는 복숭아와 토마토, 가을에는 무화과와 밤, 겨울에는 귤과 고구마, 곶감. 계절이 길어수록 먹고 싶은 음식은 길어지고 그만큼 잘 먹고 나면 다가 올 계절이 그리워진다. 기나긴 겨울의 안녕을 알리는 입춘이 지나고 볕이 따뜻해졌지만, 달력은 2월에 머물러 있으니 겨울에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여전히 자주 먹는다. 


아침이면 한 입 크기 고구마 몇 알을 집어 냄비에 담고 야채솔로 솔솔 씻는다. 씻은 물은 흙이 마른 화분이 있다면 나눠주고, 냄비에는 새로운 물을 살짝 담아 20분 정도 끓인다. 고구마를 삶는 동안 고구마 향은 슬금슬금 모양 없이 다가오는데, 냄비에 모든 물이 사라지고 고구마 껍질이 바스락 익을 때면 장작불에 굽듯한 향이 진하게 난다. 고구마도 맛있지만 고구마향으로 집 안이 포실포실해지는 기분은 늘 좋다. 그런 고구마를 겨울 길이만큼 너끈히 먹고 나누게 홍동 '논밭상점'에서 10kg 한 박스 주문했다.








"우리 아빠 박종권농민은 지구와 살아가기 위해 가족과 함께 유기농 농사를 짓고, 농민과 소비자가 따뜻하고 공정한 거래를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논밭상점을 돌봅니다." (논밭상점 소개 더보기)


논밭상점 고구마는 고구마만큼 고구마 짓는 사람도 정성스레 소개한다. 우리 아빠가 짓는 고구마. 아빠를 우리 아빠라고 부르는 말에 글쓴이의 애정이 보여 사랑스럽다 못해 지구와 살아아가기 위해 유기농 농사를 짓는다니 믿음까지 놓였다. '유기농 그 건강에 좋고 비싼 거요?' 질문한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말하고 싶다. 건강은 먹는 사람만이 아닌 먹는 사람까지 닿기 위한 시작부터 좀 더 너른 건강을 위해서니 맞고 값은 비싸지 않으니 틀렸다. 그 가격에는 '내일'이 담겨있다. 유기농 농사는 오늘을 위해 농산물을 조금 더 빠르고 쉽게 기르는 농약과 비료의 힘을 빌리는 대신 내일을 위한 땅, 물 그리고 주변을 살핀다. 그만큼 일거리도 많다. 농약을 뿌리지 않으니 벌레는 더 자주 찾아오고, 화학비료가 없으니 스스로 자라는 힘이 늦되다. 그 대신 자주 논밭을 살피고 땅에 있는 모두에게 편안한 거름을 두고 기다린다. 내가 주문한 고구마 또한 자라는 동안 누군가의 양분이 되거나 집이 되면서 탄소를 땅에 담아두고, 농약과 화학비료로 오염되지 않은 밭을 통과한 물은 다시 비가 되었다. 누군가를 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둔 유기농 농사 자연스러운 순환을 만들어 고구마 한 박스에 내일을 담는다. 이쯤 되면 이미 값은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보다 더 담겨있는지 모른다. 요즘 농부님들은 농사는 이전보다 더 고군분투하며 내일을 만들고 있다. 


내가 겪은 작년 한 해를 떠올리면 

6월은 수시로 비가 내려 가방에 늘 우산이 들어 있었고

2020년 기후장마에 이어 비가 많이 내릴 것을 걱정한 여름은 비 대신 그저 무더웠다.

선선히 걷기 좋은 날씨를 떠올린 10월은 갑작스럽게 영하의 날씨가 찾아와 이르게 패딩을 꺼냈고

더 추워질까 걱정한 겨울은 춥지 않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서야 몸을 둘둘 감싸는 긴 패딩을 꺼냈다.  

전문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기후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 쯤은 지난 계절을 떠올리면 충분히 알게된다. 약속을 하기 전, '이 즈음 따뜻해서 만나면 좋겠지?' 내일을 기대하기엔 예상할 수 없는 날씨와 미세먼지, 코로나라는 변수가 가득하다. 그저 오늘의 날씨를 만나고 당황하면서 지금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점점 내일 없는 날들을 보낸다는 기분에 무기력해지지만 유기농 고구마 한 박스는 다시 내일을 상상하게 만든다. 


오늘도 유기농 농사를 짓는 농부님들은 가늠할 수 없는 기후를 보내고 있다. 작물을 만나는 내일을 위해 보다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분주히 농작물 주변을 살피며 지주대를 세우고 작물을 옮기지만, 역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면 좌절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키워낸 작물로 내일을 만드려 한다. 그 내일 덕분에 자연에게도 안전한 일이 내게도 안전함이 되어, 고구마를 먹을 때 농약을 걱정하며 껍질을 깎거나 과하게 수세미로 문지르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겉에 묻은 흙이 사라질 만큼 물에 솔솔솔 닦고 삶을 뿐이다. 그리고 껍질째로 먹는데, 한 입 베어 물면 저절로 참 맛있다 느끼는 고구마라니 여전히 남은 겨울이 행복하다. 껍질까지 다 먹으면 남는 것이 없으니 마지막까지 자연스럽구나 싶다. 조금 해야 될 일이 있다면 다 먹기 전까지 고구마 사이 사이 무르지 않았나 살펴보고 통풍 좋은 곳에 두면 된다. 봄바람이 부는 춘분이 올 때면, 남는 것은 종이 박스와 박스 겉면에 붙은 테이프일 테다. 조금 더 수고를 한다면 테이프는 잘 떼고 박스는 톡톡 접어 재활용하면 된다. 


봄이 다가오면 딸기 소식이 궁금해져 고구마는 잠시 잊혀질테지만 올 겨울의 만날 고구마는 다음 겨울을 기다리게 한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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