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가 낫고 보니 책상 위 하루치 약이 남았다. 병원에 가면 약속한 듯이 처방해주는 3일치의 약. 왜 2일도 4일도 아닌 3일인 걸까? 묻고 싶지만 몸이 아프니 약을 먹는 일에 집중한다. 처방된 3일치의 약을 아침 점심 저녁 꾸준히 먹다 보면, 2일 차 즈음 몸이 가뿐해진다. 이전과 다르게 알맞은 몸을 만난 듯이 편안하다. 물론 진료한 의사 선생님도, 약을 처방한 약사 선생님도, 나를 걱정하는 짝꿍도 내게 다 나은 것 같아도 처방받은 약을 꼭 먹으라는 말을 하지만 몸의 개운함을 느끼는 순간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 분명 그 전 날까지만 해도 몸의 개운함을 찾기 위해 삼시세끼 부지런히 먹고 식후 30분에 맞춰 약도 꼭꼭, 물도 꼭꼭 마셨는데. 어제와 다른 몸의 간사함에 '너 왜 그래?'묻고 싶지만 약이 놓여있는 선반대를 열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하루치 남은 약봉지들이 나란히 서있다. 애매하게 한 두 봉지 남아있는 약들은 버릴까 하다, 약은 약이니깐 다음에 몸이 아프면 비슷한 증상의 약을 먹어야지 싶어 늘 두게 된다.
물론 안다. 약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안다. 잠시나마 어린이집 교사를 하면서, 많은 약을 사고 많은 약을 버렸다.(그리고 많은 양의 쓰레기를 '아까워'하며 버렸다. 이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질 테니 다음으로 넘기며) 우리 집에 있는 새살을 솔솔 돋게 하는 연고는 몇 년째 같은 약서랍에 있는데, 어린이집에서는 개봉 후 6개월이면 버렸다. 약의 실제 유통기간이 6개월이었으니까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따랐다. 6개월 지나 버릴 때면 거의 새것 같은 모습에 그동안 아이들이 덜 다쳤구나 싶어 다행이다 싶으면서 아까웠다. 그렇다고 더 듬뿍 바를 수도 없고 유효기간을 두기엔 '안전 지침'이니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 아까운 약들은 어떻게 되었냐면,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일반쓰레기통으로 버렸던 것 같다. 특별히 재활용도 되지 않고 필요가 없으니 가뿐히 쓰레기라고 여기고 버렸다.
약의 하이라이트는 부모님 집이었다. 여기저기 약봉투와 병이 쌓여있다 못해 넘쳐있다. 매일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아빠와 병명이 확인되지 않아 아픈 증상에 따라먹다 남은 엄마의 약, 위가 좋지 않아 자주 소화제를 복용하는 동생까지. 어느 날 엄마는 서랍장 이곳저곳에서 언제 조제했는지 알 수 없는 약들을 정리하다 일반쓰레기에 버리면 안 될 것 같아 약국에 가서 물어보았다 했다. 약을 주었으니 어떻게 버리는지 알까 싶어 약국으로 갔더니, 약사는 엄마의 물음에 정확한 답을 주지 않고 일반쓰레기에 버려도 똑같지 않을까요라는 애매모호한 답을 주었다 했다. 약사의 답에 엄마는 황당하다며 우리에게 이야기했고, 그제야 내가 지난 시간 동안 무심코 쓰레기통에 버린 약들이 떠올랐다. 그럼 약은 어디에다 버려야지?
답은 쓰레기통이 아닌 폐의약품함에 배출해야 한다.
가루약은 포장지를 뜯지 않고 그대로 모으고 알약을 포장된 비닐, 종이, 케이스 등을 제거하여 내용물만 배출한다. 물약(시럽약)은 소량의 경우 중화 산화환원의 방법으로 배출(이게 무슨 말이야?), 대용량의 경우 PET병에 모아서 보건소 배출한다. 기타 의약품인 연고 등 특수 용기에 담겨 있는 경우 그대로 배출한다. 내가 사는 지역은 폐의약품을 보건소와 동주민센터에 놓여있는 함에 버리지만, 지역에 따라 약국에 가져다주어 폐기하기도 한다. 배출방법을 촘촘히 살펴보니 지난날 나의 '쓰레기니깐 쓰레기통이지'라는 짧은 상상력에 아차 싶다. 좀 더 상상을 넓혔다면 일반쓰레기는 소각 또는 매립이 되니까 소각이 되었다면, 약품에 의해 유해물질이 나오고 매립이 되었다면 물과 토양에 스며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가 가득 밀려왔다.
후회스러움에 집에 놓인 약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일반쓰레기이다. 매달 꼭 한 번 이상 먹는 월경통약(외 감기약, 소화제 등 대부분 포장재 형태가 비슷하다)은 종이 포장재와 설명서는 종이지만 약이 담긴 통은 플라스틱과 알루미늄이 분리가 잘 되지 않으니 일반쓰레기, 상처에 붙이는 밴드와 연고 모두 일반쓰레기. 약국에서 받아 오는 약의 봉투는 종이지만 약포지는 일반쓰레기. 쓰레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병원에 가는 순간 더없이 늘어난다. 환자의 몸을 살피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 대부분 일회용품이고, 주사기는 플라스틱 재질로 보여 분리되나 싶었더니 이것저것 담긴 폐의약품 통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입원한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코로나로 매일매일 폐기물들은 끝없이 쏟아지고 최근에는 오미크론 전파력이 심해지면서 몸에 감기 증상이 보이면, 코로나19진단키트로 검사하는데 세세히 보면 플라스틱, 종이 등 다양하지만 감염을 우려해서 사용 후 비닐 안에 넣어버리기를 권장한다.
몸이 아픈 것만으로도 아픈 대로 속상한데, 쓰레기까지 걱정하려 하니 서러워지려 한다. 그래서 내 몸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면 우선 쉰다. 깨끗하게 씻은 후 방의 온도를 높이고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고 잔다. 약을 먹어야지 빠르게 호전되지만 약의 힘 없이 스스로 낫는 힘과 면역을 기르려 한다. 물론 이보다 좋은 것은 운동이라 생각하여 아침마다 요가를 30분씩 해보려 한다.
아프지 않은 것이야 말로 가장 쉬운 제로웨이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