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밖에 없는 딸 국제 미아 되면 어쩌려고 그래?
"하나 밖에 없는 딸 국제 미아 되면 어쩌려고 애를 혼자 일본에 보내?"
"자기가 알아서 다 잘 연락했고, 도착하는 날짜며 시간이며 정확히 전달했대. 당신 딸 똑부러지잖아. 뭐가 걱정이야?"
나의 일본행을 목전에 두고, 부모님은 설전을 벌이셨다. 딸을 혼자서 일본에 보내면 어쩌냐고 걱정이던 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걱정할 것 없다는 입장.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결단을 내린 우리 엄마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편지 한 통 없이 전화기 너머로 전한 정보로 초등학교 5학년 딸을 혼자 일본에 보내다니. 물론 내가 커가는 동안 세상이 많이 변한 탓도 있지만, 나라면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딸 혼자 해외로는 못 보낼 것 같은데 말이다.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신 엄마의 용기가 존경스럽다.
아즈미를 처음 만난 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10살 여름. 홈스테이를 통해 아즈미짱이 우리 집에 처음 왔다. 매주 참여하는 다언어 활동프로그램에서 홈스테이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이를 통해서 홈스테이를 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혹시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홈스테이 알선 단체를 통해 사전에 가족의 인적사항을 주고 받았다.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과만 교류했고, 여러 번 홈스테이를 하면서 염려하는 나쁜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낯선 누군가를 집에 들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아이를 낳고 나서야 깨달았다. 한 번 홈스테이로 손님을 받으려면 집도 치워야 하고, 매 끼니는 아니더라도 한 두끼 정도는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도 준비해야 하고, 한복도 한 번 입혀보고, 한국의 문화를 체험해주게 인사동 나들이도 한 번 해야 하고. 이러한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가 좋아하고 즐긴다는 이유로 홈스테이가 있을 때마다 신청을 하셨다. 내가 언어를 직접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데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엄마가 하루 종일 집에서 생활 다언어 테이프를 틀어두기만 했다면 관심에 그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홈스테이를 통해 한 언어가 실제로 사람과 사람이 의사소통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실제로 홈스테이는 그 당시 내가 일본어에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 년에 한 두 번 뿐인 홈스테이였지만, 내가 일본어를 더욱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기엔 충분했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명동, 이태원을 소개시켜주고, 윷놀이 등 전통 놀이를 하고, 홈스테이가 끝나고 나서도 편지를 주고 받고. 언어가 달라도, 사는 곳이 달라도,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했다. 사람과 교류하는 데 있어서 언어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엄마는 그 무렵 내가 일본어에 관심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나의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해 엄마는 홈스테이를 신청하여 꾸준한 동기부여를 해 주신 것이다. 공부로 일본어를 배웠다면, 꾸준히 동기를 부여하고 지속할 수 있었을까.
영어를 글로 배운 엄마. 엄마는 나에게 자신이 배운 잘못된 방법으로 언어를 '공부'시키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대신, 나에게 언어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그 덕에 나는 언어를 대화하기 위한 의사소통으로 습득할 수 있었다. 엄마의 원조 덕에 언어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의 단계별 발달 상황에 맞게, 나의 관심사에 맞게 적재적소에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셨다. 엄마가 나의 코치였고, 감독이었다. 나를 믿어주셨고, 바른 방향으로 관심이 뻗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를 쳐 주셨고, 영어가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해주셨다.
"곤니찌와 아즈미짱. 히사시부리데스네"
"곤니찌와 조은짱."
부모님, 아니 '아빠'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다.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 출국장을 나와 눈 앞에 보인 건 나의 일본인 친구 아즈미짱과 그의 아빠였다. 오랫동안 보지 못 한 아즈미짱. 만나자마자 반가움에 서로를 껴안았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엄마, 아빠 없이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낯선 일본 땅을 밟은 것이다.
아즈미가 우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우리는 이따금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 받았다. 당시엔 이메일이 흔하지 않았고, 특히나 시골에 살던 나의 일본인 친구 '아즈미'의 집에는 인터넷조차 잘 터지지 않았다. 히라까나도 가타까나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지만, 아즈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스스로 일본어 글씨를 깨우쳤다. 문법도 제대로일 리 없었지만, 서투른 일본어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편지를 주고받을 수록 글씨쓰기에 더욱 익숙해졌고, 점점 더 잘 쓰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언어를 습득하고 체화하는 데, 동기부여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꾸준한 듣기 환경 속에서 나는 일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관심이 홈스테이를 통해 확장되었다. 일본어 쓰기를 공부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 한 친구가 보고 싶어 홀로 비행기를 탔다. 꾸준한 동기부여가 있었기에 이 모든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그 덕에 20년 전 엄마의 엄마표 다언어를 체험한 나는 성장했고, 성공궤도에 올랐다.
편지로만 주고 받던 아즈미의 집에 발을 들여놓은 첫 날. 일본의 가정집에서 나는 특유의 향. 천장이 높은 시골의 이층집.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무알콜 샴페인을 따자, 천정까지 한없이 솟아오르던 코르크 마개. 그리고 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스끼야끼.
그 날 저녁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 모든 경험은 언어가 밑바탕되지 않았다면, 꾸준한 동기부여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