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

오렌지빛 할머니는 내 기억속에 영원히 살아 있어.

by 내 곁

할머니에게 나는 어떤 손녀였을까.

그렇게 할머니를 잊고 살아서는 안 됐는데.

그렇게 할머니의 손을 쉽게 놓아 버려서는 안 됐는데.

우리 할머니, 내가 얼마나 서운하고 보고 싶었을까.

내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할머니 여름이야. 내가 여름 좋아하는 거 할머니는 알지?

콩알만 한 여자아이가 혼자서 지하철 2호선 16개 역을,

혹시라도 잘못 내릴까 봐 역 수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헤아려가며 타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어.

“어른은 안 계시니? 혼자서 탔니? 어디까지 가니?” 말을 걸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마구 질문을 해댔지. 나는 울 것 같은 지경이 되어서야 열차에서 내릴 수 있었어.


대림역 2번 출구에 내려서 지름길로 가면 넉넉히 15분이면 도착하는 그 길이, 큰길로 돌아 돌아가자면 작은 보폭을 아무리 바삐 움직여도 40분은 족히 걸렸어.

익숙한 골목길이 보이고 그 골목 거의 끝부분 오른편에 있는 초록집 대문 집.

뙤약볕에 걷느라 힘들었던 것도 잊고, 이 길이 맞는 건지 걱정이 되어 울고 싶었던 것도 잊고 나는 할머니 집으로 내달렸어.철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가서 “할머니!!!!!”하고 외치면 “어이구 내 새끼!” 하고 맞아주던 할머니가 있는 그 집.

얼음물에 타주던 오렌지 주스는, 제대로 섞이지 않아 가루가 혓바닥에 꺼끌 거리고, 너무 차가워서 머리가 띵했지만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지.

지금도 그 맛이 생생하게 기억나.


방학이 시작되면 할머니 집으로 바로 달려갔지.

그리고 개학하기 하루 전날에 돌아왔는데 그렇게 돌아오면 내 집이 얼마나 낯설던지.

우리 엄마가, 우리 언니들이 너무 낯설어서 나는 그만 할머니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

할머니 집에서 특별히 할 게 있었던 건 아닌데.

그냥 할머니랑 삼시세끼 만들어 먹고, 시장에 다녀오고, 안방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연속극을 보는 게 그런 게 그냥 좋았어.


꼬부랑 할머니는 허리가 기역자로 굽어 있었지.

내 손을 꼬옥 잡고 뒷짐을 지고 걸었는데 열 걸음에 한 번은 허리를 펴면서 “아이고 허리야” 했지.

할머니는 숫자를 헤어리지도 않는데 어쩜 그렇게 꼭 열 걸음에 맞춰 허리를 펴는지. 그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나는 속으로 계속 숫자를 세면서 따라 걸었지.

할머니가 아이고 허리야 하면 깔깔깔 웃었는데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면서 뭐가 그리 웃기냐고 핀잔을 줬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따라서 웃었어.

할머니가 웃어서, 나는 그게 좋았어.

할머니의 걸음은 아주아주 느렸어.

꼬마인 나만큼이나 자그마한 할머니의 발로,

천천히 천천히 땅을 누르듯이 걸었지.

항상 바빴던 엄마는 걸음이 빨라서 엄마와 시장을 다녀오는 날이면 뛰듯이 걷곤 했는데 할머니의 걸음은 나보다도 느려서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여기저기 해찰도 하면서 그렇게 그림을 그리듯이 춤을 추듯이 천천히 걸었지.


할머니는 조개 된장찌개를 정말 맛있게 끓였어.

내가 오는 날이면 조개가 잔뜩 들어간 된장 뚝배기가 항상 밥상에 올라왔는데 별다른 반찬 없이도, 조개를 쏙쏙 빼먹는 재미에 밥 한 공기를 뚝딱했지.

입이 짧다고 엄마에게 항상 혼나면서 밥을 먹었는데 할머니는 그러면 체한다고 절대 혼내지 않았어.

혼내지 않아도 꿀꺽꿀꺽 잘 먹었지.


할머니는 키가 작고 앙증맞은 체구에 수줍게 웃는 게 귀여웠어.

반면 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늘씬한 미남이셨지.

건축가였던 할아버지는 우리 집도, 할머니 집도 모두 직접 설계하고 지으셨는데 몽당연필을 귀에 꽂고 일을 하는 할아버지는 어린 내 눈에도 정말 멋져 보였어.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얼마나 어여뻐하셨는지 나는 알지.

마당에서 놀다가 갑자기 집 안으로 들어설 때면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무릎에 앉혀두고 티브이를 보고 계셨는데 그 광경을 들킬 때면 할머니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면서 부끄러워했지.


초록집 철 대문을 열면,

오른쪽으로는 할머니 집 현관 유리문이, 왼쪽으로는 부엌 하나, 방 하나의 셋방이 있었잖아.

그 단칸방에는 주로 젊은 신혼부부가 아기와 살았지.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그 방에서 보냈어.

아저씨가 공장에 출근을 하면 아주머니는 종일 미싱에 앉아 일을 해야 했고,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기는 나와 같이 놀았어.

아기를 보는 것은 아주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어서 난 늘 피곤했지만 눈만 뜨면 그 방으로 달려갔지.

사실은 아기를 보는 것보다 할머니가 나를 찾는 게 좋았어.

끼니때가 되면 밥을 차려두고 나를 부르면서 “밥 먹자~”하는 게 괜히 좋아서 할머니가 나를 찾아줬으면 했지.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할머니가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줬어.

느린 할머니 걸음으로 되돌아가려면 너무 머니까 그만 오라고 하는데도 할머니는 정류장까지 따라왔지.

버스가 출발을 해도 할머니는 한참을 서서 뒷짐을 지고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어.

나도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차창으로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또 봤지.

할머니. 알아? 난 그때 항상 울었어.

그렇게 남겨두고 온 할머니가 안쓰러워서,

금방 헤어진 할머니가 또 보고 싶어서 가슴이 너무 아팠어.

그렇게 아쉬우면 또 금방 할머니를 보러 오면 되는 건데.. 그땐 몰랐어.

단지 그 낯선 느낌이 너무 이상해서, 그 가슴 아린 게 너무 아프기만 해서 할머니 집을 가는 게 꺼려졌지.

헤어질 때가 이미 걱정이 되고 미리 가슴이 아프기 시작해서 할머니에게 가는 게 망설여졌지.


할머니.

스무 살이 된 나는 아주 예뻤지?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할머니가 그랬지?

별처럼 반짝거리던 나는, 친구들과 노는 게 너무 재밌었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유롭게 놀다 보니 매일매일이 축제였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

약속은 매일 있었고 재미난 일은 세상에 넘쳐났지.

그래서 할머니를 잊었어..

발로 뻥 차면서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할머니는 기다렸을 텐데,

열 손가락 다 써가며 조갯살을 빼먹던 내가 할머니는 그리웠을 텐데,

잠자리에서조차 할머니 옆이 아니면 잠들지 않던 나를

할머니는 쓰다듬어 주고 재워주고 싶었을 텐데,

나는 할머니를 잊고 나만의 인생을 찾아 훨훨 날았지.


마구잡이로 자른, 짧은 커트 머리를 한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 아니야.

나를 바라보고 있어도 텅 빈 눈동자의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 아니야.

이모가 볶아주는 파마머리를 항상 예쁘게 빗던 우리 할머니는,

사랑 가득한 눈길로 나를 보던 우리 할머니는,

거기 없었지.

그래도 난 할머니가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줄 줄 알았어.

계속 내 옆에서, 계속 그렇게 잔잔하게 미소 띠며 웃어 줄 거라 생각했어.


할머니랑 다시 걷고 싶다.

우리 둘이 손 잡고,

할머니의 구부러진 등에 같이 뒷짐을 지고 그렇게 걷고 싶다.

한 고개 넘어서 아이고 다리야, 두 고개 넘어서 아이고 허리야.. 할머니랑 노래부르면서 그렇게 걷고 싶다.


기대고 걷다가 세워두면 앉을 수 있는 유모차가 새로 나왔다던데, 그게 그렇게 좋다던데..

허리 아픈 우리 할머니 사주고 싶다.

할아버지와 큰 아들을 먼저 보낸 울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냐고 안아주고 싶다.

조개 가득 들어간 된장 뚝배기, 내가 바글바글 끓여놓고 할머니랑 마주 앉아 먹고 싶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서 여기저기 아프다고 할머니에게 투정 부리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많이 보고 싶다. 할머니.

아주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