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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자신의 딸에게는 미안한 초특급 교사

유한한 감정에너지에 대한 아쉬움

by 김다라

세상엔 훌륭한 선생님들이 참 많으시지만, 그중에서 유독 훌륭하신 교사 끝판왕이 계셔요. 교사여서 다행이고, 교사여서 고맙고, 교사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하는 상상도 되지 않는 분들. 교과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시면서 학생의 감정과 상황에 진심을 담아 적극적으로 임하시는 분들 말이죠.


학생들도 알아요. 자신들을 위해 감정과 시간을 갈아 넣는 선생님이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인기가 많거나 수업기술이 뛰어난 선생님도 물론 좋지만, 고통을 함께 느끼고 함께 즐거워하는, 나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하는 사람임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이런 선생님은 학생뿐 아니라 부침을 겪는 선생님이나 도움이 필요한 초보 선생님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교육에 대한 깊은 의지와 고민을 갖고 계신 이런 선생님들은 동료교사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전체 교육에 기여할 것이라 믿고 계십니다. 그래서 학생에게 그러하시듯, 주변 교사들을 살피고 조금의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며 최선의 지지를 해주시죠.


제가 초보 선생님일 때, 저희 학교에도 그런 선생님이 계셨어요. 정년퇴직을 앞둔 외국어 선생님이셨는데 퇴직하는 순간까지도 회화 연습을 하며 본인 교과와 관련한 전문성을 키우셨죠. 또한 저 같은 초보 교사들에게도 쉽지 않은 기회를 주시기도 하고 필요한 정보, 지름길을 주저 없이 알려주셨어요. 선배교사가 조언을 해준다는 느낌과는 결이 달랐어요. 그분은 진심으로 초보 선생님들이 당황스럽고 어려운 과정을 빠르게 건너뛰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길 바라셨어요.


학생들도 그 선생님을 신뢰했어요. 인기가 많은 선생님과 신뢰를 받는 선생님의 두 포지션을 모두 유지하시며 항상 애쓰시는 모습은 언제나 빛이 났습니다. 세상 어떤 일이든 평생을 해 오셨으면 매너리즘에 빠질 만도 하고, 특히 학교에서 상처받는 일이나 어려움이 적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그분은 모든 것에 최선이셨죠.


그러던 어느 날, 그 선생님과 저경력 교사들이 함께 식사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께 많은 부분에서 배우고 있다고, 교육을 대하는 태도를 닮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선생님께서는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 선생님들께서 각자의 역할과 철학으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잖아요. 요즘 말도 많고 힘든 일도 더러 생기지만 결국은 좋은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요.”


말씀이 멋있어서 입을 벌리고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저를 보며 선생님은 민망하셨는지 한 마디를 덧붙이셨어요.


“그리고 난 내년에 퇴직이지롱~”


그날, 좋은 대화들이 많이 오갔어요. 그리고 선생님이게 저와 비슷한 나이의 자녀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말씀을 하시며 선생님은 아련한 눈빛으로 젊은 선생님에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자기 역할 열심히 하면서 잘 사는 여러분들의 엄마가 부러워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는 선생님 같은 분을 엄마로 두신 자제분이 더 부러운데요? 항상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시잖아요.”


그 말은 진심이었어요.

평소에 어떻게 아이들을 대하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봐 왔으니까. 특히 저 같은 특수교사 입장에서 단호함과 무조건적 지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모습에 감동까지 했거든요. 가정에서 저런 방법으로 아이를 키운다면 무슨 일을 해도 잘 해낼 것이고, 어디서든 인성이 빛이 날 거 같다.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약간 슬픈 표정으로 말씀하셨어요.


“학교에서 종일 애들과 있다가 집에 가면 정작 내 아이에겐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너무 힘들었거든.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설거지부터 했는데 그때 아이가 종아리에 달라붙어서 칭얼거렸어요. 유치원 이야기, 학교이야기, 친구 이야기, 하루 이야기…

하지만 나는 아무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어요.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거든. 그러니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못하고 늘 비키라고만 했죠.

사실 요즘 우리 딸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어요. 내가 그때 설거지를 멈추고 종아리에 붙어 종알대는 우리 딸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지금처럼 방황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학교에서 학생들과 상담할 때만큼이라도 우리 딸과 대화를 나눴다면… 그랬다면 더 긍정적인 아이로 컸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선생님이 젊은 교사들을 둘러보며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았어요. 선배 교사로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어요. 엄마의 입장에서 교단에 들어선 반짝이는 젊은이들이 부러우셨던 모양이에요.


안타깝게도, 그 선생님의 목소리엔 약간의 후회가 묻어 나왔어요. 요즘 감정 소모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선생님께서는 그 단어를 듣자마자 자신이야기라고 느끼셨대요. 그럴 만도 하죠. 아무리 고경력의 초특급 교사라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어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사용해야 하니까요. 60세의 그 선생님은 학생들을 위해 감정을 써야 할 때, 아낌없이 사용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자녀에게 사용했어야 할 감정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본인의 자녀에겐 차가웠다.라고 생각하신 듯해요.


가슴이 아팠어요. 동료 교사가 존경을 표하고, 은사로 생각하는 학생들이 늘면 늘수록 자신의 자녀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한 겹씩 쌓이고 있었어요.


대화의 끝에도 그랬고, 지금 이 글의 말미도 그렇고. 저는 “그럼에도” 혹은 “그래도” 와 같은 좋은 마무리를 하지 못하겠어요. 한정된 한 사람의 감정에너지는 한계가 명확한데, 감정에너지를 연료로 요구하는 ‘가르치는 일’의 무게가 무겁습니다.


어려워지는 환경과 달라지는 사회의 요구는 어쩌면 교사에게 더 많은 감정에너지를 사용하도록, 그것이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사람의 ‘의무’라고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럴수록, 나의 감정을 보듬고 교사가 아닌 개인이 사는 삶의 영역에서 나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소중한 사람을 잊지 않도록 해야겠어요. 당장 저부터 말이죠.


아! 참고로 선배선생님은 퇴직 후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며 지내고 계시고요, 자녀분도 자기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셨다 합니다.


문득 생각이 나서 카톡 프로필을 찾아봤습니다. 따님과 함께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이 프로필에 올라와 있네요. 부디 선생님의 귀한 감정에너지가 따님과의 즐거운 삶에 사용되고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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