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을 활용한 수업은 굉장히 효과적입니다. 비단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 학생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하루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 경험을 글로 옮기는 연습, 분량에 맞는 글을 작성하는 연습 등 기대할 수 있는 점들이 많죠.
고등학교 2학년인 정희는 지적장애가 심한 편이었어요. 의사소통이 절반만 되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간단한 대화는 할 수 있었고, 작문에 어려움이 있어도 불러주는 말을 받아서 쓸 수 있었어요.
저는 정희에게 그림일기를 그려오게 했어요.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그림으로 가져오면, 다음날 그림에 어울리는 일기를 문장으로 저와 함께 다시 쓰는 수업이었죠. 다행히 정희의 아버님께서 퇴근하시면 늘 아이와 그림일기를 그려 보내주셨습니다.
수업은 잘 진행이 되었습니다. 은근슬쩍 정희가 잘 모르는, 이를테면 ‘평화로웠다.’, ‘윙크’, ‘그렇지만’ 과 같은 단어를 섞어서 쓰기도 했어요. 잘 모르는 단어지만 자연스럽게 반복해서 사용하다보면 정희가 새로운 단어를 알게되고 나중에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되기도 했죠. 실제로 생활속에서 단어도 많이 늘고 그림일기를 통해 대화를 주도적으로 할 수 있어서 아이가 좋아하는 수업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순간 갑자기, 아이가 일기쓰기를 거부했어요. 오랜 기간동안 참여도 잘 하고 즐거워 하는줄 알았는데 갑자기 수업을 거부하고 심지어 그려온 그림일기를 찢는 행동도 보였어요.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나봐요. 아이를 보내시면서 아버님은 '어제 아이가 피곤해 해서 그림일기를 쓰지 못했습니다.' 라고 문자를 보내주셨죠.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일까요? 혹시 1년 가까이 해왔던 수업방법에 다시 고민을 해야할까요? 처음부터 시행착오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동안 잘 해왔던 수업인듯 했는데…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저는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일기쓰기 활동을 잠시 멈췄어요.
정희가 일기쓰기를 거부했던 이유를, 저는 우연히 알게 됐어요. 학교 체육대회를 한 다음날 정희는 집에서 그림일기를 5장 그려왔어요.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장난치는 그림, 단체 줄넘기 하는 그림, 계주 선수를 응원하는 그림 이었습니다.
아. 정희는 일기쓰기를 거부했던 것이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각자 바빠진 친구들이 수능 준비에 열을 올렸어요. 그러다보 지나치듯 이라도 정희와 소통하는 일이 아마 줄었겠죠. 고3 이다 보니 현장학습이나 조별활동 등도 적어지니, 정희가 원반 친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갑자기 재미가 없어진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간 썼던 일기의 절반은 원반 친구들과 있었던 일들 이었거든요. 부족한 특수반 선생님은 그런 마음을 예상하지 못하고 엄한 고민만 했던 겁니다.
뒤늦게서야 정희의 마음을 눈치채고 정희와 오랜만에 일기쓰기 수업을 했습니다. 정희는 전에없이 흥분해서 많은 말을 하고 또박또박 글자를 썼어요.
몇 주뒤, 교무실에서 졸업앨범 시안을 확인하라는 말을 듣고 얼른 가서 정희의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졸업앨범에는 조별로 컨셉 사진을 찍어서 싣거든요. 저는 정희와 정희의 조 친구들의 컨셉 사진을 봤습니다. 친구들은 마치 부채춤을 추듯이 동그랗게 서서 큰 나뭇잎을 들고 있었고, 정희는 큰 꽃송이 모형을 들고 가운데서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고마운 아이들은 정희의 학교생활을 말도 안되게 꽉꽉 채워주고 있었습니다.
졸업식날, 정희는 그동안 직접 색종이를 접어 모아놓은 장미꽃을 모든 친구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이제 스무살이 되는 학생들은 조잡해보일 수 있는 꽃을 받고 정희에게 고맙다고 인사해 주었습니다. 저는 정희의 반 친구들에게 ‘선생님도 선생님 입장에서 너희에게 정말 고맙구나.’ 하고 인사했습니다. 아이들은 민망해 하며 교실로 돌아갔습니다.
“정희야, 선생님이랑 마지막으로 일기장 쓸래?”
정희는 환하게 웃었지만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마도 친구들에게서 느꼈던 감사한 마음을 홀로 온전히 품고 싶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