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장애학생이 있으면 ‘도우미 학생’을 두고 운영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동수업할 때 장애학생과 함께 움직이거나, 소소한 것들을 옆에서 챙겨주는 역할을 하죠. 모든 학교생활을 따라다니기 어려운 선생님 입장에서 도우미 학생들은 정말 감사하고 고마운 친구들입니다.
지적장애가 있는 슬기는 선생님 혼을 쏙 빼는 학생이었습니다. 장애가 심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도 크고 워낙 왈가닥 아가씨였죠.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요. 한 번은 엄마가 골라준 옷이 마음에 안 들었다며 하교를 거부한 적이 있었어요. 등교 거부는 들어봤어도 하교 거부는 처음이었습니다. 이럴 때 선생님의 반응이 자칫 아이의 고집부리는 행동을 강화시킬 수 있거든요. 저는 슬기의 어머님께 전화로 상황을 전했어요.
“아이고 어쩌면 좋아요, 선생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슬기 어머님의 한숨.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요.
어머님과의 의논 끝에 그날은 슬기의 고집에 대응하지 말고 지켜보기로 했어요.
“그래~ 그럼 가지 말고 교실에 있으렴. 마침 선생님도 교실에 있어야 해.”라고 도도하게 말하고 반응을 기다렸어요. 어머님은 슬기를 학교에 두고 문 잠가 버리라고 하셨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요? 흠, 칫, 뿡 하고 뚱한 표정으로 교실에 앉은 슬기는 저녁 7시가 넘을 때쯤 배고프다며 휴전 제의를 했어요. 3시간이 넘는 냉전이 끝에 우리는 떡볶이로 극적 평화 타결을 했고 다음날 슬기는 엄마한테 엄청 혼났다며 울면서 등교했습니다.
독불장군 우당탕탕 왈가닥 아가씨에게도 도우미 친구가 있었어요. 글자를 잘 못 읽어 시간표를 보기 어려운 슬기의 교과서를 챙겨주고 이동수업을 할 때도 잘 챙겨 다녔죠. 항상 서글서글하게 웃는 도우미 친구의 표정은 저보다 온화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우미 친구가 제 교실을 찾아왔어요. 저는 또 슬기가 무슨 사고를 쳤나 싶어서 얼른 나가봤는데 도우미 친구 혼자 왔더라고요. 우물쭈물하며 할 말을 못 하는 눈치길래 친구를 교실로 들이고 핫초코를 타 주었습니다.
“슬기한테 무슨 일 생겼니? 괜찮니?”
라고 물어보는데 도우미 친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어렵게 이야기를 이었습니다.
“선생님, 저 슬기 도우미 그만해도 돼요?”
오 마이갓. 그래서 바로 말 못 하고 우물쭈물했구나! 저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심장이 쿵 내려왔습니다.
“그럼 그럼! 당연히 그만해도 괜찮아!”
저는 지체 없이 대답했지만 도우미 친구는 표정이 개운치 않아 보였습니다. 워낙 천성이 선한 아이여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임에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겁니다.
봉사활동 점수나 약간의 보상이 주어지지만, 장애 친구의 도우미를 해주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성가신 일입니다. 억지로 해서도 안되며, 설사 이 친구처럼 중간에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되레 그간의 도움이 고마운 일이죠.
다만 도우미를 그만하고 싶다는 이유가 궁금했어요. 추궁하는 느낌이 들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왜 그만두고자 하는지 이유를 물어봤죠. 도우미 친구는 공부를 좀 하려고요,라고 답했지만 애써 둘러대는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날 오후, 저는 슬기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도우미 하던 친구가 이제 그만하고 싶다며 저를 찾아왔어요. 공부를 하려고 그만한다는데 그건 아닌 눈치고… 혹시 선생님은 아시나요?
이어진 담임선생님과 긴 대화를 통해 그제야 도우미 친구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어요.
도우미 친구는 제 생각보다 훨씬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의 신망을 얻고 있으며 동시에 주변을 잘 보듬었죠.
슬기는 항상 자신을 챙기는 그 친구가 어느 순간 진짜 보호자라는 생각을 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마치 선생님에게, 엄마에게 하는 투정을 그 친구에게 계속 부렸나 봐요. 보호자 입장에서 아이고 이것아~ 하고 넘어가는 ‘엄마가 싫다, 선생님이 밉다’ 같은 말까지 친구에게 하고요. 아무리 속이 깊다 해도 중학생인데 얼마나 상처가 됐을까 싶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저는 도우미 친구를 불러 그동안 정말 고마웠고, 가장 잘해줬고, 중간에 멈추고 싶다고 이야기해 준 용기도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이를 다독였어요. 가질 필요가 없는 죄책감이 들었는지 도우미 친구는 펑펑 울었습니다. 그 마음조차 예뻐서 꼭 안아주고 싶었어요.
도움반 교실로 돌아오니 슬기가 뭔가에 삐져서 뾰로통해 있습니다. 아이고 이것아… 싶다가도 조금이라도 성숙한 어른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무겁게 느껴졌어요. 그날 슬기와 마주 앉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상황을 설명하고 학교생활을 재구조화했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에게 투정 부리는 일이 서서히 줄어들었고 도우미 친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을 지키며 슬기를 도와주었습니다. 아슬아슬했지만 결국은 무사히 졸업까지 왔죠. 졸업식이 끝나고 도우미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인사하는 그 친구에게 저는 더 깊게 고개를 숙여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5년 뒤. 모르는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저 5년 전에 슬기 도우미 했었는데 기억나시나요? 저 이번에 특수교육과 입학했어요!”
…
……
………
… 아이고 이것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