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많은 번데기

나를 선생님으로 만든 아이들- 아홉 번째 이야기

당시 초등학교 4학년 우리 반에는 지난 화의 재호처럼 노래를 좋아하고 명랑하며 앙칼진 친구가 있던 반면 존재감을 가린 조용한 친구들도 있었다. 연희도 그중 하나였다. 연희는 중도중복장애 학생으로 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휠체어를 탔으며, 척추측만이 심해 한쪽 옆으로밖에 눕지 못했다.


연희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음식을 씹어 삼키지 못해서 위에 직접 삽입한 튜브에 유동식을 주입했다. 다들 급식이나 간식을 맛나게 먹을 때 연희는 음식 맛을 보지 못하고 위루관으로 영양만 섭취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가끔 초콜릿을 녹여 입술에 살짝 발라주었다. 그러면 혀와 입술로 빨아먹고는 입맛을 다시며 맛있어했다.


연희는 은은한 미소와 무구한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그 미소는 늘 사랑스러웠다. 몸이 차서 늘 따뜻하게 몸을 데워주어야 했다. 담요를 워낙 좋아해서 덮어줄 때마다 환하게 웃었다. 손을 감싸 안아주고 꾹꾹 주물러 주고 담요를 덮어주면 하품하다 잠에 들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가끔 나들이를 하러 나가면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호기심도 많고 겁도 많은 아이였다. 이 아이를 위해 무슨 활동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연희를 위해 여러 가지 수업을 계획했다.



의사표현과 신체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중도중복장애 아동이라고 할지라도 교수학습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은 몸의 감각기관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인지를 조정하며 발달시킨다. 피아제(Piaget)의 인지이론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스스로 '생각의 집'을 짓는다. 인간의 의식에 세상을 이해하는 틀인 '도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를 만났을 때 원래 알던 틀에 쏙 집어넣는 것을 '동화'라고 하고, 원래 알던 것과 달라서 틀을 고치거나 새로 만드는 것을 '조절'이라고 부른다. 동화와 조절을 반복하면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균형인 '평형'을 찾아갈 때 우리의 생각은 한 뼘씩 더 자라난다.


어린 시절에 몸을 움직이고 감각으로 느끼는 경험은 인지 발달의 뿌리가 된다. 아기가 물건을 입에 넣거나 손으로 흔드는 행동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세상을 탐구하며 지식을 만드는 중요한 공부인 셈이다. 하지만 몸이 불편하고 지적인 발달이 느린 중도중복장애 아동들에게는 이러한 과정에 장벽이 있다. 스스로 몸을 움직여 환경을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세상을 탐험하고 생각의 주머니를 넓힐 기회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는 발달 단계에 맞는 특별한 도움이 꼭 필요하다.


여기서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고 경험의 범위를 넓혀주는 일이 중요해진다.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자극이 생각의 틀을 깨우는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신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아이들에게 꽃향기를 맡게 해 주거나, 보들보들한 헝겊을 만지게 하고, 반짝이는 빛을 보여주는 것은 아이들의 멈춰있던 생각 주머니를 흔들어 깨우는 작업이다. 이런 감각 자극은 아이들에게 "이건 뭐지?"라는 호기심을 갖게 하고, 기존의 생각을 조금씩 수정하며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게 도와준다.


수업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세상을 조종해 보는 경험을 만들어줄 수 있다. 보조공학 기기를 활용한 환경 통제 경험이나 다감각 환경(MSE) 활동을 들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특정 기기를 연결한 보조공학 스위치를 손 근처에 둔다. 아이가 그 스위치를 툭 건드렸을 때 갑자기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거나 선풍기 바람이 나오거나 비눗방울이 펑펑 터진다면 어떨까? 아이는 "어라? 내가 움직이니까 세상이 변하네!"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이야기의 전개에 맞춰 여러 촉감을 경험하게 하거나 조명을 조절하거나 향기를 맡게 하는 '다감각 이야기' 수업은 아동이 환경의 변화를 통해 파편화된 감각 도식을 통합하도록 돕는다. 최소한의 움직임과 소통으로 환경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경험하면 중도중복장애 아동도 능동적인 학습자로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이처럼 중도중복장애 교육은 아이의 작은 반응 하나도 소중한 배움의 시도로 읽어주고, 아이가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해주는 과정이다.




연희와 소소한 추억이 많았다. 스탠더에 세워놓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일(나의 독백이었지만)이나 매트에 눕혀 스트레칭해주고 재우던 일, 여러 가지 수업을 하고 같이 자주 나들이 가던 날들을 기억한다. 나는 거의 날마다 일과를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그 사진들이 연희의 학교생활을 추억하는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을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다. 휴대폰 너머 연희 아버지의 목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선생님.. 연희가 오늘 아침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어느 날 연희는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장례식은 따로 하지 않고 집에서 약식으로 치렀다. 가족들과 학교 선생님들만 모였다. 담임인 나는 연희를 보내는 마지막 길까지 동행했다. 화장터에 들어간 연희의 몸은 한 줌의 고운 재로 나왔다.


장지는 어린이 추모공원인 나비정원이었다. 우리나라 첫 번째 어린이 추모원으로 나비처럼 훨훨 날아 좋은 곳으로 떠나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랬다. 연희 어머니는 남편에게 안겨 서글프게 울었다. 연희 아버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속으로 울고 있음을 알았다. 연희의 어린 두 동생들은 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듯 나비정원에서 즐겁게 뛰어놀았다.




"나비"라는 이미지 때문에 생각나는 책의 대목이 있다.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는 하버드 메디컬스쿨 신경외과 교수로 왕성히 활동하던 중 갑작스러운 뇌막염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7일 만에 소생했다. 그때까지 그는 뇌를 "의식을 만드는 기계"라고 생각했고, 임사체험은 뇌가 만들어내는 환각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그러나 그 경험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뇌 기능이 정지되어 있던 며칠의 시간 동안 사후의 영적 세계를 생생히 경험한 것이다. 그는 <나는 천국을 보았다>(원제: Proof of Heaven)라는 책을 썼다.


알렉산더 박사는 "평생 노력해도 나에게 다가온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묘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라고 하면서, 그 경험을 소개하는 일이 마치 절반의 알파벳으로 소설을 쓰려는 시도와 같다고 표현한다. 책에 따르면 그는 사후세계에서 영적 존재들의 은빛 몸을 '들었고', 희열의 극치로 물결치는 그들의 노래를 '보았다'.


그는 수백만 마리 나비 중 하나의 날개 위에 앉은 한 점의 의식으로서 나비 날개에 앉아 광대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유영하다가,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의식을 가진 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하고 조건 없는 사랑, 무한한 신적 존재를 만났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자기 몸으로 돌아왔을 때, 마치 사람을 개미의 몸에 욱여넣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표현한다. 책은 그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생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연희를 보내고 나서 이 문장을 다시 읽게 되었다.


많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현실적이고 견고해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의식은 그저 희미하게 귀에 속삭이는 유령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식이 더 중요하다. 의식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이며,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론적인 차원에서 이 말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해야 한다. 이 뇌는 우리가 활동할 수 있도록 기능해 주기는 하지만, '사랑, 용서, 하나 됨, 목적, 의미'로 가득한 진정한 우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절망적일 만큼 부족하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 中


그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 우리네 삶은 번데기와 같은 것이다. 나비가 되기 전의 번데기. 어쩌면 우리는 중도중복장애를 가진 아이와 같이 영적 감각이 잠든 상태로 번데기 안의 세상이 전부인 양 사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용서, 자비와 희생, 정의와 용기처럼 추상적이지만 숭고한 가치를 품은 이야기를 자주 듣고 그 장면에 자주 드나들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또한 잠든 감각을 일깨우는 작업일 터다. 번데기 바깥세상을 더듬어 발견하기 위해서. 세상과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는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눈물짓게 하고, 다잡게 만들고, 행동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세계 너머, 사람들의 인정 너머로 존재하는 어떤 질서를 느끼게끔 하기도 한다. 그런 장면에 직접 머무는 사람에게는 삶이 그 손을 들어 진실과 진리의 길목이 저기에 있다고 가리켜 줄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 길목에 이른 사람은 기도하게 될 것이다. 올바른 길이 있다면, 그 길로 가게 해달라고. 그를, 그녀를 용서하게 해달라고. 불의에 맞설 용기를 달라고. 계속해서 사랑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말이다.


연희는 특별히 상처 많은 연약한 번데기였다. 그 아이가 번데기의 껍질을 벗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는 보지를 못했으니, 그저 그려보는 것이다. 휠체어 앞에 뻣뻣한 육신을 허물처럼 벗어버리고, 아름답게 빛나는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는 부활의 장면을.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15:42-44


보고 겪은 일을 썼으나, 인물의 이름과 상황은 일부 각색하였습니다.


이븐 알렉산더 박사의 임사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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