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선생님으로 만든 아이들- 여섯 번째 이야기
경욱이는 말은 못 했지만 특유의 발성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몸이 작고 앳된 아이였다. 기분이 좋을 때는 내 품에 기대어 폭 안겨서 싱글싱글 미소 지었고, 언짢을 때는 책상에 엎드려 빡빡머리를 손으로 덮고 비비면서 강아지 마냥 낑낑거렸다.
경욱이는 자기감정에 솔직해서 그 귀여운 표정에 다 드러나곤 했는데, 그 겉과 속의 같음이 퍽 매력적인 아이였다.
경욱이는 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 일을 했으므로 주 양육자는 할머니였다. 외동아들의 하나뿐인 손주. 게다가 늦둥이였다. 연세 많으신 할머니는 손자를 끔찍이 귀여워했다. 학교에서야 선생님들이 봐주지만, 하교 이후에는 손자를 먹이고 놀아주고 씻기고 재우며 키웠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며… 자나 깨나 경욱이 걱정이셨다.
나는 소집해제를 하면서 경욱이와 헤어지게 되었고,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였다. 교육실습생으로 학교 실습을 나가야 했는데, 공익근무로 복무하던 특수학교로 돌아간 것이다.
3년 만에 만난 고등학생 경욱이는 키가 훌쩍 커 있었고 목소리도 굵게 변했지만 특이한 억양만큼은 그대로였다. 나는 중학교 한 반을 맡게 되어 경욱이와는 수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일과가 끝나면 자주 찾아가서 만났다. 아쉽게도 녀석은 끝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교생으로 있는 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매일 수업지도안을 쓰고, 교구를 만들고, 수업을 준비하는 것만도 바빴다. 게다가 우리 반 아이들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ADHD가 있는 경도지적장애 친구는 자기 얘기만 하느라 바빴고, 다운증후군인 친구는 자신에게만 관심을 주기를 바랐다. 한 친구는 조용히 앉아서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덩치 큰 두 자폐 학생들은 자기 세계에만 빠져 지냈는데, 갑작스레 거친 폭력성이 튀어나오곤 했다.
쉬는 시간에 한 녀석이 다른 녀석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가, 대판 싸움이 났다. 나보다 더 덩치 큰 녀석들이어서 떼어 놓느라 진땀을 뺐다. 둘은 씩씩거리며 다시 서로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런 친구들을 상대로 무슨 수업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지도서를 뒤적거리는 날이 날마다 되풀이되었다. 실습의 꽃은 마지막주에 하는 공개수업인데, 그때 교장감님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들이 참관을 하러 온다. 더구나 나는 이 학교 공익요원 출신의 교육실습생으로 필요 이상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았다.
비가 장대 같이 내리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불길했다. 보통 발달장애 친구들은 비가 오면 컨디션이 좋지 않다. 이 날은 특히 심상치가 않았다. 공개수업은 2교시였는데, 1교시부터 사달이 났다. 한 녀석이 수업 활동을 잘 마쳐야 주는 젤리를 당장 내놓으라며 난동을 부리는 것이다. 한 교시 내내 어르고 달래고 혼내도 소용없었다. 급기야 녀석은 책상을 머리 위로 거꾸로 들고 집어던졌고, 담임 선생님의 정강이에 정통으로 맞았다. 선생님은 신음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녀석은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젤리를 주자, 이번엔 다른 녀석들이 자기도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젤리를 다 나누어주었을 때쯤 다른 선생님들이 참관을 하러 한 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주간 준비한 회심의 수업을 막 시작할 참이었다. 여러 교구를 구비하고 학습자료도 많이 준비했다. 그렇지만 이미 원하는 것을 얻은 친구들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여전히 쏟아져 내리는 비와 저기압의 영향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무도 내 발문에 대답이 없었고, 열심히 참여하겠다고 자기만 믿으라며 기대감을 부풀 게 했던 녀석은 "재미없다~ 우~~~"만 반복했다. 나중에 장난이었다고, 죄송하다 하는데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업은 말 그대로 폭망 했다. 몇몇 선생님들이 위로해주기도 하고 조언해 주시기도 했지만 첫 공개 수업을 형편없이 마친 그 착잡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그 후 십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무수히 많은 공개 수업을 했는데도 그만큼 선명하게 기억나는 수업은 없는 것 같다.
3학년 여름방학부터 해 온 임용 공부는 교생 기간에 잠시 중단했다가, 실습 이후 다시 시작했다. 나는 졸업 동기들과 임용 스터디를 했다. 모두 동생들이었지만 나보다 영민하고 센스가 좋았다. 공부할 영역을 나누고 매주 퀴즈를 풀었는데, 모임에 늦거나 빠지거나 퀴즈를 틀리면 정해진 벌금을 물었다.
학교에는 임용고사 준비실이 있었고, 개인 사물함과 칸막이 책상이 있어 도서관보다 더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기숙사에 살면서 매일 아침 7시에 고시반에 입실해 11시에 퇴실했고, 밥은 동기들과 같이 먹었다. 단조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그날도 그랬다. 그 문자 메시지가 날아오기 전까지는.
경욱이가 하늘나라로 갔어요.
XX 장례식장 3호실
.....
...
한동안 그 소리가 귓가에 맴돌곤 했었다.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그럼에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 그 울음소리.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 생때같은 자식과 손자를 하룻밤에 잃은 늙은 어머니이자 할머니의 곡소리였다.
아이고 내 새끼...
우리 아들, 경욱이, 내 새끼, 내 새끼들...
이제 나는 어떻게 살라고....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을 일순간에 꺼트린 건 교통사고였다.
할머니는 아들과 손주를 한 번에 잃었다. 그 찢어지는 통곡이 주는 압도적인 슬픔과 무력감에 모든 조문객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학교에서 다 같이 조문을 갔으나 끝내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앉지도 못하고 밥도 먹지 않고 말없이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말할 때까지.
갑시다..
나는 나란히 놓인 경욱이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보았다.
아버지는 연로한 어머니와 중도 장애인 아들을 집에 두고 홀로 밖에 나가 열심히 일을 했다. 고단하고 외롭기도 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날은 모처럼 일찍 들어와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간만에 가진 아들과의 나들이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리고, 함께 떠나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 누구도 모르는 그들만의 달콤한 휴식, 그리고... 아무도 기억 못 할 죽음.
그 수고와 막간의 쉼과, 삶과 죽음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이는 이제 이 세상에, 아마도, 더는 없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 이렇게 내 기억의 편린을 굳이 궁색하게 꺼내 놓고 만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의 죽음을 맞닥뜨린 게 그 때가 처음이라 그런 걸까. 부자의 비극적인 죽음과 할머니의 애통함이 그냥 잊혀진 게 못내 안타까워서 그런 걸까. 어쩌면 그때의 슬픔이 그 후에 찾아온 다른 슬픔과 이어져서 그다음 슬픔, 또 그다음 슬픔으로 옮겨가며 내 속에서 계속 메아리치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내가 본 경욱이의 마지막 모습은 그게 아닌데, 내 마음에는 내 품에 폭 안겨 생글생글 웃는, 그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마지막 인상으로 남았다. 헛헛한 마음 때문에 힘이 들었다.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수업을 하고, 흥분하고 싸우는 아이들을 말리고, 교과서를 뒤지며 지도안을 쓰고, 아이들이랑 간식을 나눠먹고, 임용 서적을 달달 외우다가, 경욱이가 죽었다. 마음 한편에 묵혀둔 의문이 다시 피어올랐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이미 많이 보았고, 앞으로 더 많이 마주할 것이었다. 죽음이 이렇게 모든 것을 앗아간다면 이 모든 일이 다 무슨 소용일까?
한 때 삶이던 죽음은 너무 허망하고, 또 그 앞에서 인간은 너무 무력하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남은 자는 슬픔의 굴레를 뒤집어쓴 채 살아가야 한다. 티 내지 않고 살아갈 뿐.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다. 어쨌거나 모든 사람이 저마다 고유한 슬픔을 부둥켜안고, 또는 덮어 놓고 산다. 그런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나의 수고와 노동에 무슨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 아니,
슬픔의 굴레를 맨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 질문은 내 삶과 일의 표지가 되었다.
내가 품고 나누어야 할 희망은 뭘까?
살아있는 동안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건 무엇일까?
보고 겪은 일을 썼으나, 인물의 이름과 상황은 일부 각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