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이야기- 끝이 없는 수업의 세계
두 번의 대학생활과 몇 해의 수험생활을 거친 나는, 임용고사만큼은 재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고시촌에서 총기를 잃어버린 수많은 눈동자, 학원에서 줄지어 나오는 힘없는 걸음걸이, 계속 시험을 치르며 스트레스에 쪼그라든 마음을 보면서 절실히 느낀 점이 있다.
수험생 명찰을 달고 황금 같은 청춘을 태우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피폐해진다.
시험에 떨어져도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느낌에 멈출 수가 없다. 그런 악순환에 갇히는 게 가장 두려웠다.
편입한 3학년부터 임용 공부를 바로 시작했다. 딱히 결의를 다지고 한 건 아니었다. 함께 공부한 졸업동기 동생이 셋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붙어서 공부하다가, 전공과목 스터디를 같이 하다가, 성적이 잘 나오자 임용 스터디로 이어졌다. 수업 끝나면 도서관 스터디룸으로, 밥 먹고 고시반으로 같이 이동했다. 서로의 공부가 나의 공부가 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시절 공부는 밥 먹고 자는 시간 외 일상의 전부였다.
당시 특수교사 임용 TO는 너무 적어서, 사상 최악의 경쟁률이라는 말이 돌던 때였다. 정부에서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바람에, 교육부 앞에서 각종 장애인 연대, 장애아동 학부모 연대, 전국 특수교육과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그렇게 줄어든 TO는 서울과 경기도를 합쳐도 우리 동기들 숫자에 간신히 미쳤다.
옆에서 공부하는 동기들이 곧 경쟁자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다. 서로의 멘털을 붙잡아 주는 파트너이자 공부 친구이고, 미래의 동료였다. 같이 밥 먹고 퀴즈 내고 스터디하고 한 공간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괴로운 시간을 그래도 즐겁게 보냈다.
그 해 우리 동기들은 거의 절반이 합격했다. 같이 스터디한 동기 동생 셋도 모두 발령을 받았다. 나도 한 사립 특수학교에 임용되었다. 2014년의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뇌성마비와 뇌병변 장애 학생들이 많았다. 내가 처음 만난 친구들은 몸은 불편하지만 생각은 또렷한 학생들이었다. 말이 느리거나, 발음이 분명하지 않긴 해도 자기 욕구와 생각이 분명했고, 표현할 줄 알았다. 진호는 내가 말을 잘 못 알아들으면 태블릿 pc로 타자를 쳐서 말해주곤 했다. 한호는 유쾌하고 예의 바른 친구였고, 두한이는 외국에 살다 와서 영어를 유창하게 잘했다. 기명이는 오디오를 한 0.3배속 한 것 같은 소리로 느릿느릿 발음했다. 순박하고 성실한 미정이도 있었다.
수업은 봉숭아 학당 그 자체였다. 엉뚱하고 유쾌한 아이들은 수업을 난장판으로 만들곤 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한 아이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어서 서로의 장애를 다 받아주면서도 놀리기도 했다. 그 반의 멤버들만큼 진지하면서도 웃기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케미가 좋았던 반을 나는 다시 만나보지 못했다.
나는 근무 첫 해에 고등학교 영어를 전담했다. 처음엔 독해 위주로 수업을 했다. 학생들이 그간 공부해 온 방식이었고, 가장 무난한 수업이었다. 그런데 뇌병변 장애 학생들과 영어 수업을 하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일단 읽기와 말하기, 쓰기 모두에 제약이 있었다. 입과 손이 따라주지 않는 탓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다. 또 학생들의 수준이 모두 달랐다. 한 명 한 명 돌아가면서 개인 공부를 봐주다가 얼마 하지도 못하고 수업이 금세 끝나버렸다. 고민이 깊어지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계기가 찾아왔다.
신규교사였던 나에게 공개수업이 줄줄이 잡힌 것이다. 공개수업을 하면 내 수업과 교수학습지도안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해야 하고, 점수 평가와 피드백을 받는다. 신규교사 공개수업을 시작으로, 학년 별 학부모 공개수업, 동료 장학 공개수업, 연구수업까지. 첫 학기에만 공개수업을 열 번 넘게 했다. 거의 매주 수업 공개를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해도 좀 심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묻고 싶다..
수업 하나가 끝나면 ‘무사히 끝냈다’는 기분이 들다가도, 달력에 다음 공개수업 표시를 보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학생을 위해 수업을 준비하는 걸까, 보여주기 위해 준비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답은 단순했다. 수업은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경험하게 하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학습내용을 유의미하게 경험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게 수업의 본질이었다.
여러 가지 수업 방법을 실험적으로 시도했던 게 그때부터였다. 한 번은 교과서에 길 찾기에 관련된 단원이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필요한 수업활동을 구상했다. 우리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휠체어 사용자여서 주로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다녔고, 밖에 스스로 돌아다니지를 못했다. 그래서 컴퓨터로 거리뷰를 켜서 자기 집에 찾아가는 활동을 구상했다. 과연 학생들이 자기 집까지 찾아갈 수 있을까?
거리뷰를 이용하면 키보드 방향키를 눌러 사방으로 이동할 수 있고, 편마비가 심해 손이 자유롭지 못한 친구도 손가락으로 방향키 정도는 누를 수 있었다. 또 10년 넘는 시간을 함께 지낸 친구들이지만 장애 때문에 서로의 집에 놀러 가 보지도 못했으니, 제 동네를 소개할 시간도 주고 싶었다.
규칙을 정했다.
1. 집을 안내하는 사람과 거리뷰로 이동하는 사람이 한 조가 된다.
2. 안내자는 자기 집까지 가는 길을 안내하고, 이동하는 사람은 안내에 따라 키보드 방향키로 이동한다.
3. 같이 차 타고 가는 것처럼 대화는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오직 영어만 써야 한다.
나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연습하도록 두고, 직접적인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개입하지 않았다. 미션을 완성할 때까지 이 수업을 계속했다.
처음에 대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Keep going."
"OK."
"Stop here. Turn left. No, not right! Left!"
(빙글빙글 회전한다)
"Left! Lef.... you are so stupid!!"
모두가 폭소하는 가운데, 정작 미션을 수행 중인 아이들은 서로에게 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신나게 욕하기에는 어휘와 표현이 너무도 빈약했던지라 서로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조금씩 영어 욕을 알아오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분노를 표출하고 싶을 때마다 화려하게 슬랭을 구사하는 게 아닌가.
"Hey, where are you going, asshole?"
"That's your fault, you dumb fuck."
"Go eat shit."
"Yeah, you eat it."
...
집 찾아가랬더니 신명 나게 욕을 하고 앉았다. 기명이는 0.3배속의 저음으로 정성 들여 욕을 늘어놓곤 했다. 아이들은 깔깔대며 웃어제꼈지만 웃기게도 눈에 띄게 스피킹이 늘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너무 대화가 단조로워진다 싶으면 질문을 던지고 대화 흐름에 변화를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어만 사용해서 자기 집 찾아가기' 프로젝트는 모두 성공했다. 영어에 거부감이 사라진 친구들은 자기 동네에 대해 영어로 신나게 소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집까지 찾아갔다는 효능감에 대단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함께였던 사이지만 친구 동네와 집 앞까지 간접적으로나마 처음 가본 아이들은 진지하게 호기심 어린 질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아직 서로에게 더 궁금한 게 남아있다는 것이 녀석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아이디어였지만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본 나는 이것저것 수업 실험을 했다. 보드게임을 영어로 해보기도 하고, 팝송을 같이 외워서 부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앱과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연구수업에서는 영어 단막극을 하기로 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몇 파트를 재현하는 공연 수업이었다.
아이들은 영어 연극은 고사하고 연극 자체가 처음이었다. 약 30차시에 걸쳐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했고, 아이들과 열심히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애니메이션을 수 차례 반복해서 보면서 장면을 요약하고 대본을 재구성했고, 학생들은 맡은 배역의 대사를 외우고, 제스처를 연습하고, 리허설을 했다.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여자친구(지금은 아내가 된)까지 동원해 소품을 만들었으니, 나도 정말 진심이었다.
그리고 교장, 교감 선생님과 동료 선생님들 앞에서 준비한 공연 수업을 공개했다. 선생님들도 뇌병변 장애 학생들이 영어로 연극을 하는 것을 상상해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잘 해냈고, 선생님들도 인상 깊은 수업으로 평했다. 영어교사 출신인 교장선생님은 감동했다.
아마도 임용 첫 해에 나만큼 선배들과 학부모들 앞에서 수업을 많이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규교사로서는 상당한 압박이었지만 그때의 고강도 훈련이 수업에 임하는 자세와 역량의 기초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적인 수업을 많이 시도했고,(내 어설픈 수업의 희생자(?)가 되었던 제자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 과정에서 좋은 수업이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사실 수업의 경계는 넓고, 그 대상과 내용에 따라 깊이 또한 다르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세계다. 좋은 수업은 하나의 종합 예술과도 같다.
적어도 내가 만나는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수준과 능력과 기호가 저마다 다르다고 해도 하나의 교육과정 안에서 통합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과업을 완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학생을 데려오더라도 가장 효과적인 맞춤형 수업을 제공할 수 있는 교수학습설계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욕심 때문에 대학원에 가게 됐다. 더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가 아니라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전공하게 된 교육공학은 이후 코로나 시대에 또 다른 커리어의 길목을 열어주었다.
제자들은 졸업 이후 아주 가끔 학교를 찾아왔다. 세월이 흘러 녀석들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하고, 취업한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성인 장애인을 교육하는 전공과 교사가 되어 직업교육과 취업지원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 장애인 복지관에 찾아갔다가 10년 만에 만난 친구들도 있었다. 갖가지 부품을 조립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나를 첫눈에 알아보고 "선생님!"이라고 외치는, 이제는 성인인 제자를 보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성인 학습자를 가르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평생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즐겁게 수업하면서 배움의 성장을 이루면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학교를 졸업하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지 않은가. 길게 보든 짧게 보든 ‘무엇을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아마 거기까지 갈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2014년의 그 교실로 다시 돌아가는 것까지만..
아, 옛날이여!
*보고 겪은 일을 썼으나 인물의 이름과 상황은 일부 각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