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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양 Jun 08. 2019

4. 알아도 너무 아는 사이

아무 관계없는 달라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아이작 아시모프라는 분이 있다. 아직까지도 여러 영화에 나오는 로봇 3원칙과 같은 각종 설정들의 기본이 이미 70년도 더 전에 이 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SF의 거장이기도 하고 실제 로봇공학자기도 했는데 영화 아이 로봇이나 바이센터니얼 맨의 모티브가 된 작품들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제일 감명 깊게 읽었던 것은 '벌거벗은 태양'이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베일리가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극도로 발전한 솔라리스라는 행성을 방문하는데, 그곳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지는 않고 화상채팅으로만 대화한다. 주민들 모두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신체적 접촉은 물론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을 수 있는 동일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패닉에 빠져 사는 행성인들인데, 화상채팅으로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을 드러낸다. 지구인인 베일리가 그러한 행태를 몹시 의아해하는 장면이 있다.
 그 옛날에 그런 발상을 하다니. 처음 인터넷 채팅이라는 것이 나왔을 때 그 당시 어르신들의 반응이 지구인 베일리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부의 얘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위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어둠의 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 얘기겠거니 했다. 내 얘기가 될 줄이야.


 나는 대학교 때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만 4살 생일에 받은 패밀리 게임기의 원더보이나 슈퍼마리오, 영국에서도 플레이했던 요시 아일랜드와 별의 커비, 팬티엄으로 플레이했던 고인돌, 범피, 프린세스메이커, 의천도룡기, 중학교에 들어가서 했던 창세기전, 포트리스, 워크래프트 해츨링키우기(!), 밤새 했던 오투잼을 롯한 수많은 리듬게임들과 차라리 기계를 사는 게 싸게 먹힐 뻔했던 드럼매니아 등을 없던 것으로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본격적으로' 하면서 다른 사람과 온라인으로 교류하기도 했던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수많은 오픈베타 mmorpg를 거치고 정착한 게임은 마비노기영웅전이었는데, FPS 게임들에 비해 길이 간단하고 공략도 어렵지 않은 데다가 타격감이 좋아서 쉽게 빠져들었다. 게임이 액션에 치중되어 있는지라 유저 간의 소통이 주된 게임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출발하는 배 위에서 모닥불에 호박을 부숴놓고 대화를 한다거나, 길드에 들어 이야기를 하는 일은 꽤 있는 편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동기들의 게임중독이라는 시선에도 매일 2~3시간씩 게임을 하곤 했다. 나는 하릴없이 앉아서 몹이 다 잡힌 평화로운 들판을 보는 게 좋았고 몇 번의 그야말로 가볍기 짝이 없는 스쳐 지나가는 인간관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말을 걸었던 이에게서 평소보다 조금 더 친밀함을 느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고 하는 내 질문에 그는 아이작 아시모프와 윤현승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수많은 현대 SF작가 중에서 하필이면 원로 격의 작가를, 그리고 수많은 한국 판타지 작가 중 하필 윤현승 씨를 골라 대답한 점이 몹시도 마음에 들어 몇 번인가 대화했고, 연락처를 교환했고, 만나기까지 했으며 결국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사실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나와의 대화를 실시간 액션이 벌어지고 있는 보스전에서 말을 끊지도 않고 했음은 물론 그 보스도 잘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별로 놀라울 것도 없이, 그 피오나는 내 현재의 남편이다.


 남편을 만난 일화에서 게임이 한 일이라고는 겨우 3D 채팅 프로그램으로서의 소소한 역할뿐이었지만, 와우를 하면서는 게임 내 세상이 조금 다른 의미의 커뮤니케이션 장소가 되었다.  
 와우의 엔드 콘텐츠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5인 던전(쐐기돌로 강화), 하나는 25인(10~30인) 공격대(통칭 레이드)이다. 둘 다 고난도이기도 하고, 협력이 중시되며 즉각적인 소통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보통 디스코드와 같응 음성채팅이 필수다. 대부분은 오더를 듣거나 게임 내 루트나 스킬 타이밍(예: 차단)등을 정하기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 타 게임에서 음성채팅이 보조적인 역할이라면, 와우에서의 음성 프로그램은 필수적이고 게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불가분의 관계 때문에 늘 얘기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삶의 이야기들을 공유하게 되기도 하고, 결혼이나 취직과 같은 대사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 개인 시간 사용이 용이했던 레지던트 고년차 때나 몇 개월 간의 백수 시절 동안 자주 디스코드를 켜놓곤 했고, 다른 사람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기도 했고, 심지어 게임을 끈 후에도 밤새도록 수다를 떨기도 했다.


 게임하다 하는 음성 대화는 다자간 대화이고,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전화와는 다른 점이 많다. 그중 하나는, 별별 생활소음을 여럿이서 다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생이면 가끔 부모님과의 대화를 듣게 되기도 하고 보통 배우자의 목소리, 자녀가 신나서 뛰어다니는 소리, 강아지가 왈왈 고양이가 냥냥대는 소리가 같이 들린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이가 몇 살인지 혹은 강아지가 몇 마린지, 컴퓨터는 거실에 있는 것인지 등등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알게 될 때도 많다. 다 같이 '출발'해야 하는 던전/공격대 콘텐츠 탓에 본의 아니게 남의 화장실 주기를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정말 알고 싶지 않은 본인의 배변 타임을 알리는 친구가 있는데(내가 알고 싶지 않다고 외쳐대서 더 놀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도 들어서 이제는 시기가 지나면 '이놈 요즘 변비인 것인가' 같은 원치 않는 추측이 될 때도 있다. 그 외에도 누구는 바삭거리는 칩류의 과자만을 좋아한다거나, 키보드 소리가 조용한 것을 선호한다거나, 나이는 어린데 온통 트로트만 듣는다거나 혹은 직장 상사가 꼭 주말에 전화해서 이메일을 보내라고 시킨다는 것 같은 세부사항을(그리고 전화 끊은 후 쌍욕을 한다는 사실도) 계속해서 알게 된다. 아시모프의 소설에서처럼 온라인에서는 심리적 장벽이 다소 낮은 탓에 평소였다면 공개하지 않을 월급 상태나 대출상환계획, 결혼 전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까지 털어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이십 년지기 친구보다도 같이 다니던 사냥꾼(게임 내 직업 이름이다)이 나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게 되기도 한다. 많은 것을 공유하다 보니 가까워지기도 쉬워서 결국 몇 번 만나고 인연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업무상 지나가다가 들르기도 하고, 따로 약속을 잡기도 한다. 어디서부터 온라인이고 어디서부터 오프라인 인간관계라고 해야 할지 모 때가 온다. 애초에 남편을 게임에서 만났다고 해서 온라인 친구라고 부르지는 않으니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기는 하다.

 예전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편지다. 한 장 정성스럽게 써서 보내고, 수 일에서 몇 달을 기다려 다시 한 장 받고, 다시 보내는 그런 커뮤니케이션에 기다림의 미학과 각별한 정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조금 달리 생각한다. 기다림의 미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인간관계에서는 이 사람은 이렇겠지 하는 추측과 이상향에 대한 환상이 적절히 뒤섞인 것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마치 연애하던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과 약간의 가식을 잠깐 보여주는 것과 같은 관계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미 깊은 관계를 형성한 후에야 그런 기다림의 미학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겠지만, 얼마 알지 못한 사람과의 사이에서 편지란 최소한의 어쩔 수 없는 연락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요즘 것들은 학교 가서도 얼굴도 안 보고 카톡만 들여다보면서 친구랑 대화하는 거라고 한다더라'에 대한 내 대답은, 얼굴도 보고 카톡도 하면 그 친구를 세 배는 더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하면서도 '친구와 어울리는 거예요'라고 부모님께 항변하는 수많은 어린 게이머들을 옹호해 본다. 다만,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다면 자신의 일은 칼같이 챙기고 소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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