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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양 May 12. 2019

1. 점수에 목매는 사회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는 비평준화 지역에 속해 있었다. 내신점수로 순서를 매겨서 지원자를 가려 받았다. 순위가 끝번에 가까운 아이들은 시내에서 쫓겨났다. 과격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렇게 표현하곤 했다. 

 실업계에 간 동기 중에 게임을 정말 많이 하던 아이가 있었다. 어차피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게임으로 얻는 수익이 수백만 원 단위니 부모님이 따로 터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반에서 뿐만 아니라 전교에서도 1등을 하기도 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단순한 한자어도 익숙하지 않다고 킬킬대며 웃던 그 애가 한심해 보였다. 그리고 '저 아이는 남보다 무언가를 잘하는 것, 즉 등수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구나. 게임을 하면 다 그렇게 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나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하게 되었고, 그놈의 점수를 보기 위해 애드온을 깔고 사이트에 접속해서 내 순위를 보게 되었다. 절대 게임이라고 비경쟁적인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현실보다 더욱 냉혹한 경쟁사회였다. 


 물론 게임 내에는 혼자 즐길 수 있는 여러 컨텐츠가 있었고, 평화롭게 경치나 감상하면서 스토리라인을 찾아보고 '업적'을 이루는 것만 해도 수년이 걸릴 정도로 방대했다. 하지만 남과 같이 하는 무언가를 하려면, 특히나 최상위 컨텐츠를 누리려면 꼭 점수에 어느 정도는 신경을 써야 했다. 남들이 하는 만큼은 무조건 해야 하고(예를 들면 로그라는 수능점수 같은 수치가 50~80 이상이어야 하고) 거기서 노력하지 않으면 '정신 차리세요!'라거나 '집중 좀 하세요!'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게임 내 몬스터가 아닌 허수아비를 혼자 치면서 '아 왜 딜(공격력 수치)이 안 나오지...' 같은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었다(이게 좀 웃긴 게, 혼잣말을 타자로 쳐서 한 셈이다. 공들인 혼잣말이랄까) 


아직은 귀여운 표범딜..


 뭐든 열심히 하고 잘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여서일까, 참여하는 사람들은 잘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것도 모자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깎아내리거나 비난하는 경우도 많았다. 상식적으로 한 번 공격대에 참여해서 한 번의 점수가 기록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백분위 점수라면 열에 아홉은 90보다 점수가 낮은 것이 당연하다. 상대평가니까. 하지만 그보다 낮은 점수는 사람이 아니라느니, 그렇게 못할 거면 게임을 왜 하냐는 말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냥 한 번 실수했을 수도 있는데. 아직 익숙하지 않을 수도, 이제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일 수도 있는데. 가슴이 뜨끔했다. 이거, 정말로 현실과 비슷하구나. 


 공부가 다인 학교를 나와, 공부가 거의 다인 학과를 선택하면서 나는 편견에 찌들었다. 그나마 주변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 상황이라 스스로 몰랐을 뿐이었다. 세상은 전부 수능점수와 내신으로 이루어져 있는 줄 알았고 공부와 관련되지 않는 직업은 아르바이트와 일일 노동직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식해도 그렇게 무식할 수가 없었다. 소위 '많이 들어본 학교'를 들어가려면 못해도 수능이 3등급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 밑은 공부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 노력하지 않는 나태한 사람, 혹은 양아치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도 노력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누가 음악을 한다고 하면 '왜, 공부를 하지 그렇게 힘든 길을 가나, 혹시 그냥 성적이 안 되는 것 아니야?' 하고 생각했고 미술을 한다고 하면 '돈은 많이 들고 나와서는 운치 있는 백수가 될 텐데' 하고 생각했다. 부모님도 보수적이지 않으려고 노력은 많이 하시는 분들이었지만 결국은 은연중에 나 같은 고정관념들이 툭툭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수능 역시 상대평가니 중간쯤 하는 학생이라면 3등급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날 아팠을 수도 있는데, 공부에 욕심을 낼 만한 계기가 전혀 없었을 수도 있는데,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다른 능력이 있을 수도 있는데. 심지어 공부를 한다 해도 그것만으로 먹고살려면 상위 5% 정도에는 가까워야 하지 않던가. 로그가 95점이 안된다고 대놓고 깔보고 무시하는 레이드 유저나 나나 다른 이의 상황을 신경도 쓰지 않고 멋대로 재단한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은 우리 학교가 정글고 같은 계급사회였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순위권에 들면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되는 스터디룸이 따로 주어졌다. 책상 크기는 세 배는 되었고 냉난방이 완벽했다. 하다못해 창도 커다래서 하늘이 잔뜩 보였다. 아무 때나 이용해도 됐는데, 심지어 반에서 하는 자습시간에도 빠져나와 그곳에서 공부를 해도 되었다. 석차는 늘 게시판에 공공연하게 공시되었고, '학교를 이끌어 나갈 아이들'이라며 뜬금없이 수업시간에 방송으로 호명해서 따로 훈화 말씀을 듣기도 했다. 난 그게 재밌었다. 공부를 '사냥'해서 '레벨업'을 하고 '칭호'를 따는 것이. 


 보이는가? 우리 학교에서 쓰던 방법은 정확히 게임회사에서 유저가 엔드 컨텐츠에 몰두하도록 하는 흔하디 흔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한국 서버가 유난스럽다는 것이다. 이전 확장팩(와우는 새로운 확장팩이 나오면서 만렙 컨텐츠가 갱신되는 스타일의 게임이다) 때부터 알게 된 친구가 있는데, 세기말(유저가 빠져나가는 확장팩 끝물을 말한다)이 되자 북미 서버에서 게임을 하겠다며 새로 계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이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노는지 자랑처럼 얘기해 주었다. 역할 놀이를 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다며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해 주었는데 정작 내가 신기했던 것은 해당 서버에서 공격대 인원을 모집하는 많은 사람들이 로그 점수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심지어 점수를 알리기 위해 링크를 걸자 불법 사이트나 피싱사기인 줄 알고 차단해 버리기도 했다며.... 정말로 모여서 게임을 즐기고, 안 되면 자유롭게 파티를 나가고 한다는 것이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자유로우면 목표지향적인 게임을 하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사실이었다. 못하는 사람을 간신히 가르쳐서 조금 잘하게 되면 시간 됐다고 가버리고, 다시 모르는 사람이나 혹은 잘해왔지만 현재 파티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가고...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끝내는 경우가 많다고. 그러나 느리게라도 성취해내고, 많은 사람들이 서로 상황이 다름을 인정하고, 어울려 노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게임을 하는 시간 또한 현실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고 스트레스 풀러 왔다가 배로 얻어갈 수도 있는 일이기에 그런 평화로운(?) 방식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게임을 하는 방식에서도 문화 차이라는 게 있구나 싶었다.

 나는 아무리 못해도 점수를 늘 올리고 싶어 하고, 파티가 나를 포함한 파티원의 실력 부족으로 터져 나가면 화도 나고, 파티원을 가려 뽑기도 하며 중탈(중간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평범한 한국 게이머지만 가끔 이렇게 나 같지 않은 사람도 많고 내 생각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게임을 통해서 현실의 나를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파티가 터져 나가도 자신이나 남에게 화가 나지 않는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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