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ind of blue

제3세계라는 곳을 향한다는 로망

키르기스스탄 유목민들과의 시간

by 스페샬장
tempImageQ3Ac32.heic

<제3세계>라는 단어에 어쩐지 로망을 갖고 있습니다. 본래의 의미는 ‘냉전 시대에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던 비동맹진영’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흔히 가볼 수 없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만 같은 어감이 낭만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실제로는 ‘낯선 나라’ 혹은 ‘이국/異國’쯤으로 불러야 할)그 제3세계라는 곳을 찾아 먼지에 뒤덮인 짙은 밤색 재킷, 커다란 배낭에 간소한 옷 몇 벌과 얇은 책 한 권, 낡았지만 튼튼한 워커를 신고 손에는 카메라를 하나 들고 누벼보는 것은 어쩐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그런 제3세계를 여행한다는 꿈은 그 간절한 바램이 무색하게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진해서 ‘사서 고생’을 한다는 것은 역시나 두려운 일입니다. 혼자인 시절부터 그리 주저했으니, 가족을 이룬 지금은 그 로망을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일의 특성상 가끔은 뜬금없는 곳에서 업무를 해야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곤 합니다. 물론 출장이 여행과 같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상상 속 제3세계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곳으로 떠날 일이 생기면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otuskyr_03.jpg

일전에 <키르기스스탄>으로 떠날 때가 딱 그랬습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과 같은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종종 봐왔기에 나라 이름 자체는 낯설지 않지만, ‘스탄’이란 글자가 들어갔으니 중앙아시아 어디쯤에 있을 것이란 막연한 정보 이외에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더 설레였던 것이죠.


꽤 무거운 카메라와 무거운 렌즈들을 짐 속에 꾸역꾸역 넣어두었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여행용 카메라와는 거리가 좀 있어서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나지막히 한숨이 나올만큼의 3키로는 넘는 무게인데, 그 무게만큼 제 설레임이 컸다는 것을 짐작할만합니다.

otuskyr_05.jpg

승합차에 앉아 꾸벅꾸벅 졸아가며 끝없이 달려도 계속되는 평원,

고산병을 걱정하며 두통약을 꼭 쥐고 걸었던 깊고 높은 산,

별이 쏟아지는 바다처럼 광활한 호수,

활기가 넘치던 시골 마을의 시장과 같은 풍경은 제 3세계를 동경하고, 구애하며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을 꼽아보자면 무엇보다 ‘유목민’들과의 만남입니다. 자연과 어우러져 가축과 함께 떠도는 그들의 생활 자체는 어쩐지 경외심마저 느껴져서 현대 사회에서 <유목민/nomad>란 단어를 유행처럼 사소하게 쓰는 것에 거부감마저 들기 시작했습니다.

otuskyr_06.jpg

편하게 집에서 업무를 하고 싶다는 의미로 “디지털 노마드가 꿈이야.”란 식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냈던 지난 날 제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민망하게 느껴졌습니다.


곁에서 고작 며칠을 지켜본 것만으로는 유목민들 삶의 극히 일부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축을 먹일 풀을 찾아 그들은 계절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항상 움직이고 있었고, 어쩐지 그 삶의 방식이 세속적인 것을 벗어나 지구라는 별에서 태어나 살다 다시 별로 돌아가는 한 생명체로서의 삶의 방식처럼 느껴져 낭만적이면서도 숭고하게 느껴졌습니다.


재산으로서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부동산/不動産’이라는 단어를 쓰는 한국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지라 유목민들의 삶의 형태는 익숙해질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 큰 동경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otuskyr_07.jpg

누군가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인 삶의 형태가 유목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자연 속에서 쓸모없는 풀을 활용하여 가축이라는 자원을 생산해내고, 가축을 통해 식량과 가죽 등을 얻어내어 의식주를 해결하고, 날씨가 좋은 곳으로 이동하며 사는 것이 유목이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렇게 끝없는 여정을 하는 그들의 삶은 낭만적이지만, 그들의 이동식 거주 형태인 유르트(키르기스스탄 전통 이동식 가옥 형태)에서 평생을 지낸다는 것은 고단한 일상은 아닐지 짐짓 겁이 나고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otuskyr_08.jpg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경제적 지표를 빗대어 보면 빈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이 곤궁하고, 고단할 것이라 예상을 한다고 해서 그게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TV 속에서 빈국으로 봉사를 가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꽤나 심각한 표정을 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며 이야기하던 연예인들의 모습을 계속 TV 속에서 봐왔기 때문에 그런 스테레오 타입의 선입견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otuskyr_10.jpg

손톱 끝의 때들은 그들이 꽤나 거친 노동의 환경에 놓여져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가도가도 끝이 없는 대자연 속에서 작은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교육과 의료 그리고 계절 노동과 같은 도시의 관념을 갖다대면 낭만의 이면에는 역시나 고단한 삶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otuskyr_11.jpg

하지만 제가 만났던 키르기스스탄의 유목민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었고, 그들의 일상은 항상 즐거워보였습니다.


‘삶은 고단해도 일상은 즐겁구나.’

otuskyr_12.jpg

키르기스스탄의 중앙부에는 송쿨이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천산산맥에 둘러쌓여 만년설이 녹아 생긴 이 호수는 해발 3000m에 위치하고 있는데, 드넓은 초원에는 소와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호수에는 구름이 비추고, 민둥산에는 하늘이 맞닿아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줍니다.


다만 여행(출장)의 막바지에 이르러 송쿨에 도착할 때즈음엔 몸의 컨디션이 꽤나 망가져 예민해지고 말았습니다. 비를 맞은 채로 난방이 안되는 유르트에서 잠이 들었던 것이 아무래도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건조한 공기에 목과 폐의 회복력이 더디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otuskyr_13.jpg

‘3000m에서 고산병까지 와버리면 난 이번 임무를 모두 마치지 못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1년 중에 6월부터 9월까지 약 100일만 방문이 가능하다는 송쿨이기에 베이스 캠프로 정한 유르트의 시설을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생각보다 너무 훌륭하여 몸을 꽤나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걱정했던 고산병은 오지 않았고, 밤에는 밖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떠나기 전,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여 근처를 한 바퀴 돌아봅니다. 완만한 구릉과 멀리 보이는 산맥에는 만년설이 아침 해를 받아 반짝거리며 빛납니다. 그리고 그 만년설이 녹아 초원 한 가운데 작은 개울을 이뤄 호수까지 흘러들어오는 풍경이 저 세상이라는 곳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가 싶습니다.


풍경에 빠져있는데, 어디선가 아이 두 명이 막대기를 들고 소를 이끌며 나타납니다. 저와 아이들은 서로의 모습이 궁금한지 서로의 주변을 돌며 말없이 히죽거리기만 합니다.

otuskyr_15.jpg

용기를 내어 사진 한 장만 찍겠다며, 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를 가르치고는 손가락 하나를 펴서 내밀어보니 방긋 웃으며 포즈를 취해줍니다. 카메라를 뒤집어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 까르르거리며 웃더니만 다시 소를 끌고 멀리로 사라집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어스름했던 호수에는 해가 떠오르고, 얼떨떨한 것이 요정을 만났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otuskyr_16.jpg

그렇게 저의 이번 제 3국에서의 일정은 끝났습니다. 다음에 다시 일이 아니라 사진과 영상을 담기 위해서 혼자서 와보겠다며 다짐을 해봅니다만, 여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1.2키로나 되는 거대한 렌즈를 그 여정 속에서 낑낑거리며 들고 다녔었는데, 오랜만에 사진을 꺼내어 보며 기억을 떠올려보니 결국 그 아침의 초점은 아이들의 웃음에서 머물어 빛나고 있습니다.

otuskyr_18.jpg

언젠가 사진을 좋은 종이에 인화해서 아이들을 만나러 송쿨 호수를 찾아보리라 다짐합니다.


아직도 키르기스스탄을 떠올리면 호수의 차가움과 산의 건조함 공기 속에 초원에 피어있던 라벤더 향기가 묻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그 곳의 유목민들은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있겠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무래도 '폐허'를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것 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