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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샬장 Jun 09. 2024

아무래도 '폐허'를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것 같습니다만


폐허(墟) / 건물이나 성 따위가 파괴되어 황폐하게 된 터.


언젠가부터 폐허를 지날 때면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탈 것의 방향을 돌려 다시 돌아갈까?', '잠시 멈출까?' 따위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주섬주섬 휴대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켜서 장소를 저장한다거나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지도 따위의 사진을 찍어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 자신이 폐허를 좋아하는 취향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진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뮤직비디오 작업을 한 폐허에서 했다. 인적이 드문 바닷가 근처에 버려진 그 폐허는 언젠가는 작업물에 쓰리라고 다짐하고 점찍어뒀던 폐허의 '근처'로 추정되는 장소의 주변에 있는 또 다른 폐허이다. 


본래는 부서진 지붕과 기둥들 사이로 햇살이 갈라져 스며들고, 그 작은 햇살을 받은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는 가운데에 누가 가져다 두기라도 한 듯이 낡은 의자 하나가 우두커니 놓여있던 언젠가 봤던 폐허가 문득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다만 이런 폐허의 운명이 그러하듯 잔존 수명을 예측할 수가 없다. 속으로는 수년만에 기억난 그 폐허가 아직도 남아있을 것이란 희망은 실낱보다 하찮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의 끔찍한 길 찾기 능력으로는(주위 사람들은 모두 아는 심각한 길치이다.) 폐허가 있던 자리가 카페로 변한 것인지 펜션으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허물어진 것인지조차 추측할 수 없을 만큼 그 위치가 짐작도 안 간다.


제 형편없는 묘사로는 그 풍경을 설명하지 못할 것을 대비했는지 사진을 한 장 남겨놓았으니 참 다행이지 않습니까?

'동남쪽 어딘가 해안도로 근처의 식당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들어갔었어.'라는 식으로 기억을 더듬어 추정되는 근처를 배회해 본다. 그날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심지어는 식당과 길의 모양도 기억이 나건만 폐허는커녕 식당마저도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길과 방위를 찾는 기능 쪽으로는 뇌의 뉴런 자체가 아예 뻗어나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속절없이 헤매는데 부서진 벽들과 문, 수없이 붙은 우편물 송달 통지 스티커들이 켜켜이 쌓여 나무껍질처럼 되어버린 유리창 사이로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내는 그 폐허의 정체는 폐양식장이었다. 


이국적인 야자수를 배경으로 넓게 펼쳐진 노란 수조, 철거와 이동의 어려움으로 남아있었을 기계 설비들과 그 와중에 발목까지 물이 차오른 지하 공간(아마도 물을 퍼올리는 곳으로 추정됨)까지 작업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떠올려보니 난 폐허 앞을 지나가다가 멈춰서 구경을 하는 것 이상으로 몇몇 작업물에 폐허의 이미지를 담은 적이 있는데, 이쯤이면 자각을 못하고 있던 것과 별개로 폐허 '마니아'라던가 '애호가'쯤으로 자신을 인정해 보기로 한다. 


폐허를 좋아한다지만, 공포물을 좋아하는 편은 절대적으로 아닌지라 그 속에서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조금은 진지하게 정의를 내려보려 자료를 찾아보니 폐허를 선호하는 부류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글들이 키보드 몇 번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몇 개가 나온다. 


공감이 안 가는 것은 아닌데, 모르고 있던 취향을 깨닫자마자 모니터 위에 요목조목 정리된 글을 읽자니 어쩐지 결국에는 흔해 빠진 취향 중에 하나라고 하는 것 같아 인정하기가 싫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보다 본격적으로 폐허 '덕후'로서 행보를 해볼 생각이다.(거창해 보이지만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글을 쓴다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러면 그 속에서 보고 싶어 했던 것을 언젠가는 직접 마주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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