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아까 전부터 책상에 앉아있는데 미동도 없다. 내가 부탁한지가 한시간이 넘었지만 묵묵부답니다. 이 정도면 혹시 내 이야기를 못 들은건 아닌가 싶은 의문이 들 지경이다. 나는 다시금 내 마음을 도닥거린다.
'내가 성질이 급해서 문제지. 조금만 워워, 한번만 더 참아보자.'
처음 있는 일도 아니므로 나는 나 먼저 단도리 한다. 지금 이 타이밍에 한번 더 이야기 했다가는 서로 얼굴 붉힐게 뻔하다. 내가 참는게 맞다. 그녀가 안할리는 없고 그녀의 타임 스케쥴이 열심히 가동하고 있을 거다. 다만 그 타이머가 나와 전혀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 것 일 뿐이다.
이년전부터 이 선생님과 함께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보드랍고 사람 좋아보이는 푸근하고 따뜻한 이미지의 선생님이었다. 편의상 그렇게 부르지만 선생님은 아니다. 사실 실무사다. 나의 일을 도와주는 실무사. 그런데 어떤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는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건 함께 일하는 그녀와 내가 정할 몫이다. 처음 함께 일하게 되면 그 부분이 어렵다. 이 사람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낼지, 그걸 해내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동의가 안되니까. 그래서 서로 터놓고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업무롤에 대해서.
실무사 선생님의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나도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화를 하다보면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쌓인 나이테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자신과 상의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과한 업무를 시켰다가 화를 낸 사람 이야기부터다. 자신에게 그 업무까지는 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속내가 들어있다. 잘해준 사람이야기보다 실수하고 선을 넘어선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나에게 보내는 경고 이리라. 선생님과 대화를 해보니 조금 달라졌다. 그녀의 이미지.
다 들어줄줄 알고 받아줄 것만 같은데 아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자신의 경계까 정확하다. 그 선을 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오케이. 나 역시 그 선을 지켜줘야 겠다고 생각한다. 나도 무례한 사람은 아니니까. 선생님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그리고 해줬으면 하는 일에 대해서 정리를 시작했다.
막상 시킬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평소에도 남에게 부탁하느니 내가 하고 만다는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원래 나 혼자 일하는게 편한 법이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부탁하고 시키는게 사실 더 어렵다. 설명하는 시간에 내가 하는게 빠르고 부탁하는 마음을 내느니 내가 정리하는게 속편하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저 공간에 있는 이유가 있을 테니 일을 안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 딜레마다.
"선생님. 아이들편에 제가 서류 보낸 것 걷어다 주시겠어요?"
아주 조심스럽지만 선넘지 않는 상태에서 부탁을 해본다.
'네'
짧은 대답이 왔지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저 사람도 하던 일이 있겠지. 시간이 되면 하겠지.'
되도록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야 지금 당장 혹은 한시간 전에 부탁하고 나서 바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을 테니까. 답답해서 내가 먼저 아이들 교실을 돌며 서류를 챙겨오는 일을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두어시간을 기다려도 아무 움직임이 없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꺼내본다. 그 사이 내내 마음속에 담아둔 뾰족한 말들이 튀어나올새라 마음을 한 번 더 단도리 한다.
"선생님 혹시 안 바쁘시면 아까 말씀드린 아이들 서류. 가져다 주실 수 있어요?"
"아이들 이름이랑 반이 매치가 안 되서요. 그거 정리하고 나서 할께요."
뭔가를 꼼지락 꼼지락 하고 있다 했더니 그거였던 모양이다. 아이들 학년 반과 교실 위치와 이름을 매치시키는 작업. 그것이 두시간째 꼼지락 꼼지락 하고 있는 결과물인거다. 그리고 한참후에 프린터에서 그간의 정리된 결과물을 볼 수 있었다. 정성스럽게 아이의 이름과 반과 교실위치가 한꺼번에 보이도록 정리된 표였다.나름의 방식과 속도대로 자신의 업무를 정리했다. 좋다. 하지만 서류를 오전에 정리해서 일을 마치고 오후 수업을 준비하고자 한 나의 시간과는 어긋났다. 그렇다고 그녀의 속도를 무시하고 내가 대신 일을 하게 되면 그녀와 업무를 나누지 못할 것이니 이쯤에서 한 번더 내가 기다려야 한다.
흐뭇하게 정리된 파일을 자르고 코팅해서 제 책상에 붙이고 나서 그녀는 유유자적 내가 부탁한 서류를 챙기려 일어섰다. 내가 계획한 타임 테이블은 훨씬 지나쳤지만 그녀는 평온해 보인다. 이제 자신의 머리속에 아이들에 대한 교실 정보가 정리가 되었음이리라.
쉬는 시간 10분이면 동선을 짜서 5층부터 1층까지 교실을 다 돌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이것 역시 그녀의 방식은 달랐다. 5층 아이와 인사를 하고 정리를 도와주고 서류를 걷어오자면 10분도 부족하다. 그렇게 그녀는 다섯시간의 쉬는 시간에 걸쳐 서류를 모두 챙겨왔다. 아이들은 모두 하교 하고 출근 시간에 부탁한 일을 퇴근 시간에 마친 것이다. 그녀의 하루를 지켜보자면 논 적은 없다. 하루 종일 내가 부탁한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으니 그녀로서는 보람찬 하루였을 게다. 한두시간안에 모든 서류를 정리하고 한가지 일을 마무리했을 나와든 다르지만 그걸 탓할 수도 없다. 그녀는 나름 성실했고 열심히였으니까.
우리는 다른 속도의 시간을 걷지만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 때로는 서로의 속도가 달라 갸우뚱 할때도 있지만 언젠가는 만나리라는 생각으로 한발 한발 속도를 맞춰가야 한다.
맛상게아나는 행운목과다. 싱그러운 초록이 정말 상큼하다. 공기정화 기능도 뛰어나고 순하다. 예민하게 굴지도 않는다. 제 자리에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그런데 이렇게 예쁘고 성실한 맛상게아나지만 바라보는 사람은 답답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자라고 있는건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식물처럼 예쁜 새싹을 내주지 않는다. 연두빛이 빠끔 올라오는 걸 보며 기뻐할 수도 없다. 그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키가 자라고 잎이 넓어지는 맛상게아나다. 자라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자라고 있겠거니 해야 한다. 제 몫을 다하고 있으려니 하고 믿어줄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간이 지나면 빼꼼히 키가 자라 있다. 계속 함께 있는 사람은 모르지만 오랫만에 집에 방문한 사람은 맛상게아나의 성장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다.
"이거 많이 자랐네."
손님의 반응을 보고서야 느린 성장을 눈치 챌 수 있다. 까다롭지도 조르지도 않지만 제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속도를 내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맛상게아나.
그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주고 믿어주고 예뻐해 줄때 제 속도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답답하다고 분갈이를 해주거나 잎을 건드리거나 밉상이라고 구박하면 안된다. 그러면 맛상게아나는 산소를 마음껏 뿜어내며 공지정화를 마음껏 해낼 수 없을 테니까.
선생님의 느리고 여유있고 느긋한 속도를 지켜보는게 쉽지만은 않다. 껴들어 간섭하고 채근하고 싶어진다.
"그런데......뭐하세요. 도대체?"
다그치고 싶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한 번 더 내가 나를 제자리에 앉힌다.
그녀는 그녀만의 속도가 있다. 그 속도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 속도에 맞게 빛을 발하고 있으니 함부로 끼어들지 말자고 다짐한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그녀의 속도를 존중하다보면
그녀 역시 화려하지 않지만 묵묵함으로 성장의 결과를 보여주겠지
기다리고 고대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