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이리와봐. 여기 뭐라고 씌어있나 좀 읽어줄래. 엄마 눈이 안보여서 못 보겠다."
새로 산 거치대를 조립해야하는데 설명서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너무 글씨가 작게 씌여있네. 이걸 읽으라는 거 맞아?"
혼자서 궁시렁거리는데 숙제를 하던 아들이 냉큼 다가왔습니다.
"이거 설명서 영어로 씌어있는데 읽어줘? 근데 설명이 너무 허접하게 나와있는데.
설명서 보고도 만들수도 없겠다.엄마 할 수 있겠어?"
아들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순간 내 마음이 들켜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나 못할 거 같아. 아니 사실은 처음 본 순간부터 하기 싫었어. 옛날 같았으면
사용서 한번 보고 휘리릭 만들었을 텐데 말야. 요즘은 조립하기가 싫다. 머리 쓰기도 귀찮고. 완제품 살걸 하고 바로 후회했어. 괜히 조립품 사서 머리 아프네. "
설명서가 영어로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씌어있다는 것을 보고 나는 반품 생각이 났습니다. 귀찮기도 하구요. 완제품을 사지 않은 내가 바보같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사실 자세히 설명을 읽어보지도 않고 물건을 사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상품 페이지를 보면서 물건을 고르는게 귀찮아져 버렸거든요. 가격 얼마나 차이 난다고 그걸 다 찾아보고 사나 싶어서 늘 사던 사이트에서 검색 제일 상단에 나오는 걸로 골라 주문한게 화근이었지요.
"엄마. 왜 그래. 이거 별것도 아닌데. 이리 줘봐. 내가 해 볼께."
아들은 거치대를 꿰차고 앉아 이리저리 돌려봅니다.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는지 스마트폰을 꺼내서 동영상을 찾아보더니 슥삭 슥삭 조립을 시작하네요.
가녀린 손으로 공구를 만져 행여 다치기라도 할세라 조마조마했던 꼬꼬마 아들이 맞나 싶습니다. 아들의 의젓한 모습을 보니 나는 더이상 만지기조차 싫어 조금 더 뒤로 물러나 앉았습니다. 아들은 뚝딱뚝딱 나사를 돌리고 조여 거치대를 만들어 냅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순간 울컥 합니다. 어느 새 자라서 저렇게 듬직한 뒷태를 보여주고 믿음직한 아들이 되었나 싶어서요.
"다 됐다. 엄마.이거 어디둘까?"
여리디 여리던 아이가 이제 나보다 힘도 더 세졌습니다. 답답하게 앉아서 꼼지락대던 내가 낯부끄러울 정도로 말끔하게 조립을 하고선 놓을 자리를 찾네요.
"저기 베란다에 다 둬."
아들은 거치대를 한손으로 번쩍 들어 베란다로 가지고 갑니다. 마치 어릴 적 내가 자기를 안아 올리던 것처럼요. 거침없는 손길이 믿음직스럽습니다.
아들은 조립을 다 마치고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세월이 참 빠르게 흘렀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느 순간 부터 아이가 나보다 잘하는 것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어떤 분야에 있어서는 나보다 지식적으로도 아는게 많았습니다. 부모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내 말이 옳은 양 버티고는 있지만 속으로 아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내심 말은 못하지만 아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내 스스로 부끄러워 혼자서 낯을 붉히는 적도 있었지요. 물론 사춘기를 맞아 떼를 쓰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고집을 부릴 때는 한대 콕 쥐어박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요. 그것조차 논리를 찾자면 내 논리에 뒤지지 않았지요. 이제는 되려 내 비논리성을 지적하려하다가도 그냥 참아주는 때도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엄마 혹은 어른이라는 이유로 고집을 부릴때면 나 혼자 부끄러워 죽을 노릇이지요.
"아. 피곤하다."
한것도 없이 아들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그 말이 절로 나옵니다. 아들은 제 방에서 한 번 쓱 돌아보더니 나에게 다가옵니다. 아들이 내민 것은 안대입니다.
"방안에 불빛 환하면 엄마 잘 못자잖아. 나는 아직 공부할게 남아서 온 집안에 불을 다 끌수는없을거 같으니 이거 쓰고 주무세요. 잘자요."
나의 고단함을 눈치채고 슬며시 나에게 휴식을 권하는 매너까지 보입니다. 아들이 내민 개구리 안대가 다정하고 푸근해서 절로 웃음이 나오네요. 아들의 배려 덕분에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엄마 일어나세요. 오늘 병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들이 깨우는 소리에 깊은 꿀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맞습니다. 몇일 전부터 병원 예약이 되어있다고 떠들고 다녔으면서 늦잠을 자고 말았네요. 그걸 아들이 기억해 냈습니다. 깜빡깜빡하는 내 정신이 못 미더워 아들에게 몇번이나 말해두었던 보람이 있네요.
"엄마가 이제 눈도 안보여 귀도 잘 안들려 정신도 깜빡깜빡한다. 그래도 엄마 대신 작은 글씨 읽어주고 몇번씩 물어봐도 친절히 말해줘. 오늘 처럼 엄마가 잊어버리는 거 있으면 말해주고. 나도 내가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 모르겠으니까."
아들에게 한마디 툭 던집니다.
"엄마 알았어. 내가 그렇게 할테니까 엄만 늙지마세요."
아들이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습니다.
어릴때 엄마 죽지 말라고 울고불고 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엄마가 한시라도 어디 갈까봐 화장실까지 기어와 기여코 대변 냄새를 맡으면서도 무릎에 앉아있던 아이. 그 아이가 벌써 이렇게 불쑥 자랐네요. 세월이 속절없이 빠르고 나는 내 정신이 맞나 싶게 깜빡깜빡 거리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함께여서 아주 매우 든든합니다.
'그래 엄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늙을 께. 우리 아들 오래오래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게.'
혼자서 감상에 젖어 눈꼬리가 촉촉해집니다. 아들 녀석은 나를 깨우고 한잠 더 자기위해 침대에 다시 누웠습니다. 아들의 포근한 숨소리 덕에 하루 시작이 더더욱 푸근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