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러 갈게, 데려다 줄게

남편의 사랑 방식

by 김윤

통근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던 첫 직장을 다닐 때의 일이다. 운이 좋게도 살고 있던 아파트 입구가 통근 버스의 출발지점이었다. 바로 옆 동네에 살고 있던 남자친구 집은 시내버스로 두 정거장 될 만큼 가까웠고 회사 통근 버스가 정차하는 장소도 동일했다. 우리가 출근하는 시간은 비슷했기에 통근버스를 탄 채로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그를 유리창 너머로 종종 만났다. 그는 곧, 매일같이 정류장에 먼저 도착해서 내가 탄 버스를 기다렸다. 나는 항상 오른쪽 창가에 앉아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통근버스가 정차하는 단 1분간의 짧은 데이트를 즐겼다. 싸워서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남자친구는 늘 그 곳에 서있었다. 내가 그 회사를 그만두는 그 날까지 그는 변함없는 나무처럼 그 곳에 서서 날 바라봐주었다.


“너네 남편은 착한 거 말고는 별 볼일 없을텐데. 허허.” 결혼 직후, 시아버지의 농담같은 말씀이셨다. ‘나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인데, 우리 잘 만났네’ 싶었지만 실은 정말 그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은 아닐까 내심 걱정도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남자친구와 같이 살게 될 남편은 얼마만큼 동일하고, 얼마나 다를까 궁금하기도 했다. 실은, 늘 나를 바라봐주던 그가 이제는 슬그머니 다른 곳을 바라보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제일 컸다.

살아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착하기만 할 줄 알았던 남편은 가끔 못되기도 했고, 별 볼일 있을 줄 알았던 남편은 정말 별 볼일 없기도 했다. 삼십 년 넘게 함께 살았던 부자지간과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의 생활은 너무나도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래서 시아버지의 말씀은 가끔은 맞기도 했고, 가끔 틀리기도 했다.


그는 일일연속극 드라마에 나오는 여느 남편들처럼,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거나 주말이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TV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평범한 아저씨이기도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아침마다 나를 보기 위해 뛰어오던 그때처럼 여전히 내 곁의 나무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데리러 갈게, 데려다 줄게.”


같은 회사를 다녀 차를 한 대밖에 소유하지 못한 우리 부부는 한 사람이 정시 퇴근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를 데리러 가거나, 멀리 병원이라도 가야 하는 스케줄이라도 있으면 난감하다. 남편은 그런 난감한 상황이 있을 때마다 업무가 남아 있을지라도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를 아이가 있는 곳에 퇴근시켜주고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것이다. 버스를 타거나 동료들의 차를 타고 가면 된다고 극구 만류해보지만, 끝까지 데려다주고 싶어하는 그를 말릴 수 없다.


친정에서 자고 오는 나를 이른 새벽에 데리러 온 그에게 한 번은 이렇게 물었다.

“자기는 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어?”

쓰고 보니 너무나 오글거리는 말이지만, 정말 너무너무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피식,하고 웃고 마는 그에게서 통근 버스로 회사를 다니던 그 시절, 정류장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그 때 그 남자친구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쩜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나는 정말 이토록 오래 사랑받으며 살았구나.


그가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는 일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아내와 딸을 우선시하는 것보다, 회사 업무가 더 중요한 날도 있을 것이고, 그의 컨디션이 더 크게 느껴지는 날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보다 가족이 언제나 우선이라고 말하고, 또 행동으로도 보여주는 남편이라서 언제나 고마운 마음이다.


다른 지역에서 하게 된 독서 모임, 먼 곳에서의 회식, 친구들과의 해외여행, 이런 시간들마저도 그는 늘 나를 데리러 온다. 이런 일관된 행동들은 그저 이동의 편리함을 느끼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시간들은 쌓이고 쌓여서 언제 어디서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나는 늘 혼자가 아니라는 든든한 마음이 되었고,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도, 심지어 무장단체에 납치를 당하는 일이 생겨도 남편이 구하러 올 거라는 단단한 믿음 같은 것들이 되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너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태어났어?”라고 묻게 되던 그날 밤. 우주 어딘가를 방황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구하러 갈게”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을 깨달은 그 날. 나는 비로소 내가 진정으로 결혼을 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주례 선생님의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정말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비와 눈을 막아주고 바람과 태풍마저 온몸으로 막아주던 나무 곁에는 이제 그와 똑 닮은 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다. 언제 다 자라서, ‘그’라는 나무처럼 비와 눈을 막아줄지 모르겠지만, 틈틈이 시시때때로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사랑이라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 그에게 주고, 또 그에게서 열매를 따다 먹으며 그렇게 끝도 모르게 자라고 싶다.


네가 우주 끝까지 방황하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내가 널 구하러 갈게. 내가 널 데리러 갈게.


keyword
이전 11화빠삐코 우유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