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뱅크 체크카드 같은 남자

우리가 자주 추억하는 것은 풍족함이 아니라 순수한 가난

by 김윤

회식을 하던 중이었다. 1차로 고기를 굽고, 2차로 분위기 좋은 커피숍엘 갔다. 부담스러운 술자리가 아니어서 좋았고, 아늑하고 포근한 인테리어의 카페가 좋았다. 그 분위기를 타고 부장님이 신용카드를 새로 발급받았다고 꺼내 보였는데, 언뜻 보아도 고급스럽고 세련미가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플라스틱 재질의 카드가 아니라 묵직함이 느껴지는 쇠 (코발 플레이트라고도 불린다고) 재질이었다. 꽤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재질도 그렇고 알록달록한 칼러가 아닌 세련된 색감이 한눈에 프리미엄 카드임을 알게 해주었다. (지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그 프리미엄 카드를 발급받으려면 별도로 제작 비용이 발생하는데, 그 비용이 약 10만원이나 한다고. 이모저모 특별한 그 카드를 술집에서 꺼내 들면 아줌마들 눈빛이 바뀐다나 뭐라나.)

그 날 나는 말로만 듣던 연회비 50만원이 넘는 신용 카드와 대기업에 재직하거나, 탄탄한 회사를 다니며 연봉이 5천만원이 넘으면 발급 가능하다는 신용 카드를 실물로 처음 접했다. 브랜드 아파트, 고급외제차, 명품지갑뿐만 아니라 지갑 속 신용카드로도 사람들 앞에서 으쓱댈 수 있구나 하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신용카드는 그저 결제의 기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랑의 용도로도 쓰이기도 했다.


회식을 끝내고 집에 와서 남편과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이러쿵 저러쿵 하던 중, 프리미엄 신용카드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내 카드도 아니면서 왠지 자랑하는 투로 “일반 플라스틱 카드 말고 쇠 재질로 된 카드 그거 실제로 본 적 있어? 들어보니까 진짜 묵직하더라!”멋져보이더라는 말을 덧붙이며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카드를 갖게 되겠지 하며 뜬금없이 몇 년 후 우리의 미래까지 언급하며 조잘댔다.


군말 없이 내 말을 듣고만 있던 남편이 입을 뗐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카카오뱅크 체크카드도 너무 좋은데?” 자신이 프리미엄 신용카드를 갖기 위해서 얼마나 더 오랜 기간 이 회사에서 근무해야 하는지, 그만큼의 연봉을 받으려면 몇 년이 더 걸리는지, 혹은 어느 회사로 이직을 하면 좋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산을 하리라 예상했던 남편의 다소 엉뚱한 대답에 나는 눈물이 날 만큼 박장대소했다. 남편도 본인이 내뱉은 대답이 어이없었던지 곧장 실소를 내뱉었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한참을 같이 웃었다. 나는 프리미엄 신용카드의 묵직함 따위는 단박에 잊고, 귀여운 라이언 캐릭터가 그려진 하늘색 카카오뱅크 체크카드를 꺼내든 남편을 떠올리며 웃었다.


나는 가끔 남편의 중년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이십 대 취준생일 때 만나 하루에 만원의 용돈을 받던 남자친구를 기억하는 나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취한 여유로운 모습의 남편을 상상하는 일이 재밌다. 일복이 터졌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에 파묻혀 사는 그에게도 느긋한 직장 생활을 하는 날이 과연 찾아올까. 퇴근 후나 주말 아침 할 것 없이 걸려오는 업무 전화를 받는 그가 느긋한 늦잠을 자는 일상을 누리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모습일까. 열심히 살았던 보답으로 장밋빛 인생이 펼쳐진다면, 그도 남자라면 누구나 타고 싶어하는 외제차를 끌고 다니게 될까. 더 이상 기름때 묻은 유니폼을 입지 않고 단정한 정장을 입고 다닌다면 그 모습은 또 어떠할까. 그런 삶을 살게 된다면 그도 프리미엄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검지와 중지 사이에 카드를 꽂고 한껏 허세 부리는 중년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한 해 한 해 바뀌어가는 나이와 직급에 맞춰 그의 많은 부분들이 하나둘 변해가겠지만 카카오뱅크 체크카드를 쓰던 시절의 그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십대의 우리는 돈이 없어서 검소했다. 근사한 식사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를 대신해 손을 잡고 공원 걸었다. ‘1000원이 모자라 체크카드 결제가 안되네’하고 말하던 남자친구의 솔직한 가난에 자주 웃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어느 날, 한 번도 타보지 않았던 시내버스를 골라 타고 종점까지 가서 내렸다. 이름도 모르는 동네를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걸었다. 가진 게 없어도, 내세울 게 없어도, 돈이 없어도 우리는 그 때 그시절이 참 행복했다. 우리는 7년차 부부가 된 지금도 그때 그 버스를 타고 갔던 이야기를 왕왕하며 추억에 곧잘 빠진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자주 추억하는 것은 풍족함이 아니라 순수한 가난이다.

명품을 모르던 그가 어느 새 삼십대가 되면서 브랜드 이름을 하나둘 읊으며 곧장 백화점으로 가서 사올 것처럼 군다. 실은 백화점에 한 걸음만 들여도 주눅 들어서 내가 곁에 없으면 선뜻 매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기웃거리기만 하는 덩치 큰 쫄보이면서. 성과금이 들어오는 시기면 그가 갖고 싶어하던 명품 지갑이나 벨트를 선물해주곤 하는데 박스를 감싸고 있던 리본이나 다소 필요 없어 보이는 사용 설명서까지도 고이 간직하는 남편의 모습은 마치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다섯 살 아이 같다.


오래도록 그가 카카오뱅크 라이언 체크카드를 썼으면 좋겠다. 그는 주로 아내를 위한 커피 한 잔, 딸아이를 위한 보석 스티커, 자신을 위한 소주 한 병을 계산한다. 소소한 용돈을 소소한 것을 사는데 쓰는 그의 마음을 오래 간직했으면 좋겠다. 나는 오십년 쯤 지나 할머니가 되어도 덩치 큰 남편의 순수함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종종 생각하며 순박하고 순수한 그의 이런 모습을 결코 잊지 않는 이 우주상의 단 한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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