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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Oct 18. 2023

내 남편은 설거지계 박지성

작은 일도 대충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박지성급이 될 수 있다


설거지하는 남편의 뒷모습은 언제 봐도 흐뭇하다. 내 남편은 설거지계의 박지성이다. (나에겐 박지성보다 더 멋진 내 남편)





신혼 초창기 때는 우리도 참 많이 싸웠다. 나는 내가 호랑이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사람에게 우악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결혼하고 처음 알았다. 싸울 이유는 차고 넘쳤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설거지였다. 고맙게도(?) 남편은 자신의 몫의 살림을 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밥 먹고 나면 자기가 사용한 식기는 가지런히 개수대에 두는 사람이지 소파에 드러누워 TV 리모컨을 잡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 한 번, 너 한 번, 굳이 순번을 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번갈아가며 밥을 차리고 설거지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고? 설거지하는 방법이 문제였다. 


보통 설거지를 할 때에,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식기를 한꺼번에 닦은 후, 깨끗한 물에 다 같이 헹궈내는 것 아니던가? 그게 내가 생각하는 설거지의 기본이었다. 반면에 남편은, 수세미로 밥그릇 하나 닦고, 물에 헹궈내고, 건조대에 둔 다음, 다시 수세미로 국그릇 하나 닦아내고, 물에 헹군 후에 건조대에 두었다.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하나, 모두 같은 방법으로. 답답했지만 뭐,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설거지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지. 그런데 내가 짜증이 난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남편은 설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물을 좔좔좔 틀어두었다. 그것도 강력하게! 하나하나 씻어야 하니 물을 틀고 끄기가 번거로워 처음 밥그릇부터 마지막 젓가락 하나 씻을 때까지 물을 끄는 법을 몰랐다. 아주 그냥 콸콸콸 틀어두고 하는 바람에 그가 설거지를 하고 난 후에 주방은 물폭탄 난리였지만, 남편의 눈에는 '설거지'만 보였지 주방에 흘러넘친 '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설거지가 아주 뿌듯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뗐다. 

"어머! 자기는 설거지를 이렇게 하는구나. 그런데 물이 조금 아깝다.

한꺼번에 닦은 다음에 물을 틀고 씻으면 아낄 수 있을 텐데...:) "

사람은 과연 몇 번 친절할 수 있는가. 세 번? 다섯 번? 


아니다. 단 한 번. 


그다음 날부터 톤이 올라갔다. 

"물 아까워, 제발 좀 꺼!"라고 했더니 "수도세 이거 얼마 한다고 잔소리야"라고 했다.

"내가 돈이 아까워서 그래? 충분히 아낄 수 있는 건데 네가 낭비하는 거잖아."

"설거지도 내 맘대로 못해? 나는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해!"

"나는 불편해! 우리나라는 UN이 지정한 물 부족 국가.... 어쩌고 저쩌고...!!!"


그는 꼼꼼함이 가장 중요한 반면 나는 물을 낭비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사실 내 마음속으로는 설거지 그거 뭐 대충 하면 안 되나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숟가락 하나를 마치 유물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소중히 닦아 대는 남편을 보면서

'그 시간에 차라리 쉬어라'속으로 외쳤다.



처음엔 물을 조금만 써달라 정중하게 부탁을 했고 그 방법이 통하지 않자 짜증을 동반한 강요를 했다가 나중에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다. 


"자기야 제발 물 좀 아껴줘, 그냥 좀 평범하게 설거지해!"


일 년 즈음 지났을까 그는 평범하게(?) 설거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설거지한 후에 사방으로 튄 물을 닦아내는 스킬까지 보유했다. 

그릇에만 두던 시선은 이제 주방 전체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날이 업그레이드되는 그를 보면서 결혼도 시간이 지날수록 '경력직'이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9년이 지난,  2023년 현재.


무지막지 꼼꼼히 설거지하던 남편과

설거지쯤이야 그까짓 거 대~충 하면 되지 하던 아내, 나.



나는 이제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난 후 남긴 주방의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 (물폭탄난리는 옛날 일)

건조대에 놓인 그릇, 컵, 수저, 뭐 하나 빛나지 않은 게 없고 일렬종대로 깔끔하게 놓여있는 모습을 보면 

(인정하긴 싫지만) 기분이 막 좋아진다. 원래 정리정돈을 참 잘하는 사람인데 그릇까지 정리정돈을 참 잘한다. 어느 정도냐면 거기서 그릇 하나 빼기가 아쉬울 정도. (사진으로 찍어두지 못해 아쉽다.) 


나는 상대적으로 정리를 잘 못하는 편이라 그렇게 예쁘게 잘 안되는데. 설거지를 예쁘게 할 정도까지 있냐고 물을 수 있지만 그래도 집안일하고 나서의 모습이 마음에 들면 그것만큼 뿌듯한 일이 없고, 이왕이면 기분이 좋으면 좋은 일이니까.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야, 어떻게 하면 설거지 그렇게 예쁘게 잘할 수 있어?

나는 자기처럼 잘 안 돼." 


내 말에 한껏 어깨가 올라간 그는 

갑자기 팔짱을 끼며 말한다.


"내가 딱 보니까 자기는 설거지의 기본이 안 돼있어 기본이. 

설거지의 기본은 공간창출이야. 

박지성의 공간창출 알지? 그릇 넣을 공간을 먼저 확보하란 말이야.

마른 그릇을 먼저 없애주고 딱 깔끔한 상태에서 시작해야지."


박지성의 공간창출까지 등장시키며 

진지하게 말하는 남편이 너무 웃기면서도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귀찮아서 마른 그릇 위에 다가 다시 젖은 그릇을 포개버리기도 하기 때문인데 

나의 그런 습관이 있음을 아는 그는 다시 말한다. 


"으이구, 니는 퇴장이다 퇴장. 옐로카드! 레드카드!"



  




설거지 한 번에 물을 한 트럭 갖다 쓰던 그는 이제 박지성의 공간창출 능력을 발휘하는 프로 설거지꾼이 되었다. 옆에서 잔소리를 하던 나에게 도리어 잔소리를 하기도 하는 그. 


그런 남편을 곁에서 관찰한 나는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는 설거지만 잘하는 사람인가? 

아니다. 그는 뭘 하든 꼼꼼하게 해내는 사람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꼭 집안 정리를 하고

밥을 먹기 전에는 식탁을 먼저 정리할 줄 알고 

장거리 운전을 하고 난 뒤에는 차 안을 깔끔하게 정리를 한다. 

 

작은 것도 쉽게 넘어가지 않고 꼼꼼하게.

어떤 일을 시작하고 끝낼 때엔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기.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설거지조차 대충 할 수 없었구나. 

물을 낭비하게 되더라도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야 하는 사람이었구나. 


작은 일도 대충 하는 법 없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박지성'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에서 1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진 그,  

10년간 그 어떤 것도 대충 하는 법이 없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을 것(눈에 안 봐도 뻔하다.) 이 

분명한 남편은 이제 누구나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박지성급에 도달할 것만 같은 그.)









나는 이제 마른 그릇은 꼭 치운 후에 설거지를 시작한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제일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귀찮음을 극복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일의 기본이자 완성이니까. 

작은 것도 대충 하지 않는 버릇을 들여야지.

나도 언젠가 박지성급이 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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