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 Jun 04. 2022

나보다 나를 더 믿는 한 사람

내 인생 최고의 반려인 


“인생은 한 번 뿐이야. 마음가는대로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퇴사를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수없이 갈팡질팡했다. 출근길의 마음과 퇴근길의 마음이 달랐고, 금요일 밤과 월요일 아침 기분이 달랐다. 그렇게 수개월 오락가락하던 나를 남편이 붙잡았다. 하기 싫은 일은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미래를 도모해도 된다고 그는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말했다. 다시는 이 정도의 연봉을 주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나의 두려움을 비웃었다. 남편은 내가 연봉이나 명함과 같은 정해진 틀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 끝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조금 허둥댔다. 그만큼의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왠만해서는 경로를 이탈하지 않는 범생이 인생을 살았다. 대학을 갔고, 졸업 후에는 취직을 했으며,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하고, 일 년 뒤 아이를 낳았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그만두는’ 것에 크나큰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여직원이기 때문에 유니폼을 입고 커피를 타야 했고 그것이 부당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떠나는 입장은 두려운 일이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온 마음으로 지지했다. 백 만원이라도 더 벌어오라고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네가 원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오로지 ‘돈을 위해’ 일을 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지금 당장 눈앞의 돈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임을 남편은 누누이 말해왔다. 단 한 번도 일을 하며 성취감을 느끼거나 뿌듯한 적이 없었던 나에게 정말 잘 해내고 싶은 일을 찾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갖기를 권했다. 남편의 응원을 차곡차곡 저축했던 나는 회사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질질 끌어왔던 시간들을 지울 수 있었고, 덕분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반려인이다. 아마도 나는 그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알지 못한 채 늙어갈 것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속을 들여다본다 해도 결코 알 수 없는, 그의 커다란 몸보다 더 큰 마음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 마음을 먹고 쑥쑥 자랐다. 십 년 사회생활도, 매년 새끼손톱만큼 오르는 연봉도 아닌 내 곁에 있는 그 사람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빽이다.     


 함께 글쓰기를 했던 언니는 우리가 비록 김애란, 임경선, 이슬아가 될 수는 없지만, 우리의 기록을 담은 책 한 권쯤은 쓸 수 있지 않겠냐며 했다. 그 말을 남편에게 전하자 그가 말했다. “김애란, 임경선, 이슬아가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잘 알아. 내가 아는 너는 할 수 있어.” 나는 그 앞에서 김애란, 임경선, 이슬아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된다. 비록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고 가슴팍에는 그 어떤 이름표도 없지만, 내 곁에는 든든한 반려인이 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믿는 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날, 먹먹했고 또 황홀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운들이 나에게 마구 달려오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 내게 글쓰기에 꼭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보다 나를 더 과대평가해주는 사람들이요." 

<내 하루도 에세이가 될까요?> _이하루          

 

   

 글쓰기를 독려하는 에세이 <내 하루도 에세이가 될까요?>에는 “나보다 나를 더 과대평가해주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이제 그 말을 백 프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비단 글쓰기뿐만 아니다. 나보다 나를 더 과대평가해주는 사람은, 나를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글쓰기든 뭐든 기꺼이 잘 해내고 싶다. 기꺼이 최선의 삶을 살아내고 싶다. 


 이미 지나간 나의 하루를 궁금해하고 내일의 나를 챙겨주는 사람. 내가 어딜 가고 누구를 만났으며 무엇을 먹었는지 적당한 관심으로 바라봐주는 사람. 그의 직장이 우리 집으로부터 50km나 떨어져 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어느 날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겨 사막 한가운데 떨어지는 일이 생겨도, 네비게이션이 먹히지 않는 어디 시골 산길에 갇히는 일이 내게 일어난다고 해도, 그가 나를 구하러 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 망망대해 바다에 둥둥 떠 있다고 하면 그는 헤엄을 쳐서라도 나를 구하러 올 것이다. 그런 믿음은 대단하고 강력하다. 글쓰기든 뭐든 기꺼이 잘 해내고 싶다. 나아가 더 잘 살아내고 싶다.           

 

 나도 당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애틋한 반려인이 되고 싶다. 우리 함께 살아가다가 네가 넘어지는 날이 온다면 나는 온 힘을 다해 너를 일으켜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네가 방황하고 있다면 그곳이 우주 끝이라고 해도 너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당신을 구하러 갈 것이다. 


*

나보다 나를 더 믿는 한 사람_김윤 (brunch.co.kr)

매거진의 이전글 비염인의 고통을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