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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Oct 23. 2024

운전을 합니다

"혼자 가지 말고, J 서방 오면 그때 가거라."

친정 엄마의 말에 화가 났다. 남편은 출장 중이었고, 주말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나 홀로 시내에 나갈 계획이었다. 엄마는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미간을 찡그리며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라고 말했다. 그것도 여러 번. 나는 진심이냐고 되물었다. 엄마는 진심이었다. 운전 경력 10년 차에 엄마 경력도 9년이나 되는 내가, 두 아이 태우고 고작 시내 운전을 못 한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운전을 한지 꼭 10년 되었다. 누군가에겐 두 발 같이 편안한 이동 수단이고 누군가에겐 엄두도 못 낼 다른 세계인 운전. 할 수 있으면 그 무엇보다 쉽고, 해본 적 없으면 그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게 바로 운전이다. 나도 처음엔 '과연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아찔하고 두려웠다. 어려서, 여자라서, 차 유지비는 비싸니까, 아예 접근하지 않았던 그 세계. 하지만 어리니까, 여자니까, 비싸니까 더 빨리 시작했어야 했다. 하루에 버스 두 대가 몇 시간에 한 번씩 오는 시골에 있는 회사를 다녔음에도 왜 더 빨리 차를 사고 운전할 생각을 못 했을까. 버스 시간을 초 단위로 확인하며 버스 카드로 환승도 찍으며 그렇게 회사를 다녔다.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자 내 삶에 무언가를 더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엄마는 여자도 운전을 할 줄 알아한다고, 덜컥 30만 원을 보내주면서 운전 연수를 받으라고 했다. 곧장 연수를 받았고 불가능할 것 같던 도로 주행은 한 시간 만에 금세 익숙해졌다. 중고로 중형차도 샀다. 남편이 운전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따라 나갔다가 차를 다시 갖다 파네 마네, 같이 사네 못 사네, 욕을 해가며 운전을 배웠다. 




나는 이제 다른 도시에 피아노 학원을 오픈한 언니네 학원에도 다녀올 수 있다. 그곳에서 열리는 작은 독서의 세계도 잠시 다녀온다. 두 아이만 데리고 마트와 시내를 다녀오기도 하고, 주말에도 셋이서 종종 소풍을 다녀온다. "자차로 출퇴근하는 평범한 회사원"에서 "두 아이와 나 스스로를 여러 세계로 인도하는 여자"가 되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기만을, 남편이 주말에 쉬는 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에게 기대어 삶을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 함께하면 물론 더없이 좋겠지만, 엇나가는 스케줄 속에서도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볼 수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러 떠날 수 있다.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건 이런 감각이었다. 내가 계획한 것에 좀 더 쉽고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주체적인 행위.  



지난 금요일, 독서모임을 하고 돌아오던 때다. 여성의 자립심, 독립심, 회복력을 이야기하고 나오던 참이었다. 그 이야기와 맞물려 아이들만 데리고 제주도 한 달 살기 하러 갔던 그때, 운전을 안 했더라면 만들 수 없었던 그 시간, 두려웠지만 한편으론 용감했던 언니의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 몇 년이 흘러, 내게 고스란히 다가온 지금이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내게로 흘러왔다.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요즘 주말부부를 하고 있는 우리. 금요일 밤에 내려올 계획이었던 그는 토요일 오후에나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구나. 언제나 그렇듯 엇나가는 스케줄.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이들이 깨자마자 도시락을 쌌고 소풍을 떠났다. 남편이 언제 도착하는지 묻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답답해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나섰다. 가을이었고 하늘이 참 예뻤고 더없이 짜릿했다. 남편의 바쁨을 탓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기. 홀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이 시간들을 겹겹이 쌓여서 또 다른 나를 만들어주겠지. 

여자도 운전을 할 줄 알아야한다며 내게 묻지도 않고 운전 연수비를 보내주던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다. 

남편이라는 든든한 보호막 속에서만 살지 않는 나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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