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명함 10개를 가진 방송인이 전하는 글
이제 막 사회 진출을 앞둔 혹은 대학생활에 한창인 후배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의 고민은 대부분 비슷하다.
'무엇이 하고 싶긴한데'
'그것을 이룰 수 있을 지'
'도전해도 좋을 지'
안타까운 마음에, 언젠가는 남기리라 다짐했던 이야기지만
그게 하필 바쁘고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 지독한 감기에 걸린 오늘이다.
그래도 굳이 노트북 앞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편으로 나누어 써야 할 것 같기는 하지만,
나의 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나의 아주 오랜 수험(?) 생활을 되돌아봐야겠다.
얼마 전 방을 정리하다가 해묵은 내 명함들을 찾았다.
모두 세어보니 총 10장.
대학을 졸업한 나이 25살부터 34살이 된 지금까지
굵직한 대기업 명함
공기업 명함
내가 스스로 만든 회사의 명함
을 포함한 10장의 명함과 석사 학위까지 가진 나를 보며
누군가는 '능력 있다' 했고
누군가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회사를 옮기는 능력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한 곳에 머무르지 못했던 것은
끈기가 없어서라기보다 내 꿈이 그만큼 컸고 지금도 크고 있기 때문인 지 모르겠다.
누군가 내게 '직업이 뭐에요?'라고 물으면
아직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는 나는 그냥 '신지은'이 되고 싶다.
나 스스로도 아직 꿈꾸고 있기에
내가 지금부터 써내려가는 말들은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말이기도 하겠다.
나의 20대 초반은 초라했다.
누군가는 나를 '꽃다운 나이'라 부르던데 당시의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내 꿈이 '아나운서'였기 때문이다.
아나운서라 불리기에는 작을 것만 같은 나의 키,
평범한 얼굴,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이라고 믿고 있던 나의 출신 대학교,
내가 믿던 나의 브레인(?)
모두 '아나운서'라는 나의 꿈 네 글자 앞에는 한없이 작아지던 시절 22살.
KBS어린이 동요대회에 나가 당시 KBS창원 아나운서 언니를 막연히 동경하기 시작하며
10살 때부터 품은 나의 꿈은, 20대에는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하고는 싶은데 방법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절대로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22살, 용기내 KBS아카데미 수강생 모집에 지원했다.
'합격'이었다.
수강료를 내면 대부분 받아주는 아카데미여서 합격이라는 의미가 크게 없었을텐데
수강생 합격에도 뛸 듯 기뻐했던 내게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호했다.
조용히 '공부나 하라'는 말씀.
지금 생각하면 과한 말씀은 아니셨던 게 분명하지만
어쨌든 나는 부모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고,
졸업을 앞둔 7학기 종강날, 친구들과 학교 강의실 매점에 앉아 취업 이야기를 나누다
홀린 듯 학교 근처 아나운서 아카데미로 뛰어갔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만난 아나운서,
지금도 참 존경하는 선생님인 우리 원장님은
화려한 장미보다는 난초를 떠올리게 하는 분이셨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고,
가능성은 만들어가면 되고,
나의 불안한 질문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그다지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고 이제와서야 고백한다.
안될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이 일을 도전이라도 해보지 않으면
할머니가 되어서도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부모님 몰래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잠이 안왔다.
취업은 할 수 있을까 이 낮은 학점으로.
4학년 1학기를 마친 이 시점에 내가 뭐하는 짓일까.
아나운서가 6개월만에 되는 것은 아닐텐데 졸업하고는 당장 무엇을 해야할까.
힘든 나날의 시작이었다.
일단 시작을 하고 나니, 갈 길은 점점 더 길어졌지만 그래도 매일이 신이 났다.
조금씩 변하는 내 모습에(지금 생각해보면 완전한 착각이었다)
희망을 가지며, 여전한 의구심 속에 불안해하며, 학원 수강을 시작했다.
아직 내가 처음했던 자기소개 멘트가 생각난다.
"저는 무지개 같은 사람입니다"
유치하고 생각없는 자기소개였지만
대중 앞에 서는 방송인이 3개월만에 된다고 믿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큰 착각이었다.
그렇게 정규반 수강을 하던 중 우연히 넣은 삼성 인문계 인턴에 합격했고,
인턴 생활과 학교 생활을 병행해야 했다.
인턴 연수 후 캐리어를 끌고 피곤에 취해 학원을 향하던 날이 생각난다.
호강인 줄 모르고 그 때는 어찌나 서럽던지.
제일 먼저 한 일은 '발성'을 배우는 일이었다.
이 발성과 호흡은 지금도 완전히 터득했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
하면 할수록 어렵고,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힘들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시 한글을 배우는 기분이었고,
늘 답답했지만, 즐거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향한 도전이란, 이렇게 위대하다.
정규반 수강을 마치고는 스터디를 시작했다.
마음맞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신촌의 작은 스터디룸에서 스터디를 시작했다.
그 즈음,
무리없이 삼성 공채 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짧은 삼성 면접 후기*
나는 인턴SSAT를 합격했기 때문에
공채 시험에서는 SSAT를 면제받았고
바로 토론면접과 임원면접, PT면접을 치렀다.
토론면접은 굉장히 수월했다.
토론면접의 핵심 포인트는
1.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지 않는다
2. 무언가를 주장하기 보다는 한 친구가 한 주장에 대한 부연 설명, 지지의견을 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PT면접도 어렵지 않았다.
주제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경영학 관련 질문이었는데
회사의 어떤 상황에 대한 나의 의견과 해결 방안을 묻는 문제였다.
크게 3가지 키워드를 칠판에 적고 10분간 발표를 했다.
난관은 최종면접이었다. 임원분들이 내게 던지신 질문은,
1. 토익 점수가 높다. 외국 다녀왔냐
2. 학점이 왜이렇게 낮냐. (저는 학점이 굉장히 낮았습니다)
3. (전공 어려운 과목만 들었다는 나의 대답에) 핑계 아니냐. 낮아도 너무 낮다.
라는 질문을 들었던 것 같다 .
질문을 3개 받았는데 1개는 칭찬이었고
나머지는 압박 면접이었다.
무섭게 쳐다보시며 학점이 너무 낮다고 혀를 끌끌 차시는 임원 앞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다는 말이 있다고 자원해서 손을 들었다.
"고래와 새우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새우가 이깁니다.
고래는 밥이고 새우는 깡이기 때문입니다.
학점은 낮지만, 깡으로 열심히 일하는 삼성맨 되겠습니다."
이렇게 단지 '학원비'를 벌겠다는 일념으로 명함건넬 때 만큼은 뿌듯한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입사해서도, 아나운서 준비를 계속 하리란 다짐과 함께.
그게 내가 인생에서 얻은 첫번째 명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