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버림으로써 오히려 이룰 수 있었던 나의 경험들

놓았기에 얻은 내 삶의 선물들

by 이태화 작가


'어떻게 하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끊임없이 자신을 관리할 수 있을까.'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그런 불굴의 의지를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자기계발에 관심을 가졌던 초창기에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질문이었습니다. 반면, 이와 달리 제 삶에선 오히려 놓아버림으로써 성공을 이뤄낸 경험이 있습니다. 최근에도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고요.








#1.


처음 기억은 대학 입시입니다. 고3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한 번씩 과거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고3 때만큼은 결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간들 그 이상으로 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만큼 저에겐 치열했던 시기였습니다. 허나, 제 마음과 달리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수시 전형에선 불합격했고, 수능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가채점을 했을 때 '내가 잘못된 답안지를 보고 점수를 매기고 있나', '한 칸씩 미뤄서 계산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예상과 다른 현실이 펼쳐졌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지난 고생들이 한 번의 평가로 결정된다는 게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동안의 노력이 이렇게 결정된다는 게 싫었습니다. 싫은들 어쩌겠습니까. 현실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우울과 분노의 감정을 거친 뒤, 마음을 추스르고 교과서, 문제집, 노트를 모두 모았습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재수를 하고 싶다고. 내년에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친구들이 모두 수능을 마친 소회를 나누고 있을 때, 전 기말고사를 준비하며 내년을 기약했습니다. 재수를 할 경우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성적이 내신에 반영되었거든요. 어느 대학을 가니, 어느 학과를 가니, 가군/나군/다군... 저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현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후, 우연히 새로운 입시 전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1학기 때 수시전형으로 지원했다 떨어진 대학에 말이죠. 가고 싶은 대학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수능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는 학교였죠. 전형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기회였습니다. 수능 점수는 최소 등급만 맞으면 되고, 대신 다른 조건들을 만족해야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가 지원 조건이 되더군요. 당시 학교에서는 제가 합격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도 대신 다른 대학을 지원했을 때의 가능성을 이야기했죠. 그냥 제 마음에 따라 지원했습니다. 어차피 재수할 생각이었으니까요. 시험을 보러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1학기 수시전형 때와 달리 크게 긴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큰 충격을 한 번 거쳤기에, 더군다나 안 되면 어차피 재수할 거란 생각이 있었기에, 욕심을 내려놓았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시험을 마치고도 그냥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결과 발표가 있는 날. 컴퓨터를 켜 홈페이지에 접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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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합격이네.'


안방에 계시던 어머니께 찾아갔습니다.

"어머니, 저 합격했는데요. 00대학교요."


무척이나 기뻐하시는 어머니와 달리 전 의외로 덤덤했습니다. '합격이구나. 잘됐네.'








#2


그렇게 대학에 들어온 뒤, 어느덧 취업준비생이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취업 아카데미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학교 강의실에서 다양한 직무에 대해 알아보는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잠시 쉬는 시간. 화장실에 가고 싶지도 않고, 딱히 목이 마르지도 않고. 게다가 전부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 말도 없었습니다. 그냥 잠도 깰 겸 핸드폰을 깨작깨작 만졌습니다. 여간 할 게 없었나 봅니다. 비즈니스맨도 아니면서 괜히 이메일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낯선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습니다. 발송인은 네이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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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블로그가 선정되었다고? 좋겠다. 나중에 구경이나 해야겠다.' 전 2010년도의 파워블로그가 다 정해졌으니 한 번 구경 가보라는 메일인지 알았습니다. 당시 블로그를 운영한 지 1년 반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군 제대 후 복학생의 개인적인 포트폴리오로서 활용하고 있었고요. 다른 분들처럼 전문성이 있는 것도, 특정 분야의 마니아 같은 성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파워블로그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제가 선정될 거라고 기대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핸드폰을 켜 다시 이메일 제목을 확인하니 '파워블로그가 선정되었습니다'가 아니라 '파워블로그로 선정되셨습니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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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생각도 못한 선물이었거든요. 그날 집으로 돌아와 썼던 글의 제목이 오죽하면 <제가 2010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되었답니다. 파워블로그... 신기하네요^^;;> 입니다. 스스로도 신기한 결과였거든요. 되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었습니다. 되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한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완전히 비우고 있었습니다. 파워블로그가 되고자 포스팅을 하지도 않았고, 파워블로거로 선정되길 고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블로그 운영 자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취업준비생이었던 만큼 스펙에 민감했던 시기지만, 블로그만큼은 그런 결과와 상관없이 제가 즐기는 대상이었습니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행위였죠. 시간이 지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재밌게 즐긴 블로그가 제게 가장 큰 스펙이 되었습니다. 스펙을 위해 했던 활동들은 막상 그다지 스펙도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3


대학교 4학년 2학기, 취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기업, 어느 직무에 지원할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정말 가고 싶단 생각이 드는 곳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중에서도 딱 한 군데, 합격을 기대했던 기업이 있었습니다. 다른 기업과 달리 흥미롭게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작성했습니다.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기대와 달리 서류에서 바로 떨어지더군요. 그때부터 소위 말하는 멘탈이 나갔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그나마 남은 기업들에 여기저기 지원했지만 당연히 결과가 좋을 수 없었습니다. 기껏 면접까지 가도 아는 것도 대답 못하고 이상한 답변을 하고 있더군요. 평소 면접에 자신 있었는 데 말이죠. 철없게도 '그래도 여긴 붙지 않을까.' 여겼던 기업에서도 '어라. 여기라도 되어야 하는데'라는 마음을 가졌던 기업에서조차 모조리 떨어졌습니다. 공채 시즌이 그대로 날아갔습니다.


현실을 마주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았습니다. 상처가 아무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졸업 후 취업'이라는 시나리오가 당연하지 않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마음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첫 직장이 내 인생의 전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 세상을 마무리하는 날, 20대 취업시장에서 잘 나가지 못했음을 후회할 일은 없을 게 뻔했습니다. 취업 실패로 생긴 시간을 오히려 잘 활용하고 즐기자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취업이라는 사건에서 자유로워지고 정신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다음 공채 시즌, 면접을 보는 데 크게 긴장이 되지 않는 겁니다. 1, 2차 면접 모두 웃으면서 봤습니다. 면접 보는 내내 시간도 잘 가더군요. 면접 보고 나서도 '아이고 힘들었다'가 아니라 그냥 덤덤하면서도 은은히 기분 좋았습니다. 결국 떡하니 대기업에 합격했습니다. 당시 제가 얻을 수 있는 제일 좋은 결과였습니다. 전 시즌에서 면접 때 유난히 이상한 대답을 했던 기업이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 합격한 기업이 그 기업과 같은 업종이면서도 연봉, 근무지, 복지, 인지도, 기회 모두 압도적 우위에 있었습니다. 제 기준에서 말이죠. 만약 전 시즌에서 합격해버렸다면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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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합격 안내 메일, 회사에서 부모님께 보낸 입사 축하 케이크








#4


더 재밌는 건 두 번째 공채 시즌에선 마지막 대학생으로서 할 거 다 하면서 취업 결과까지 좋았다는 겁니다. 취업에서 자유로운 취업준비생. 그게 제 모습이었습니다. 공채 시즌엔 유난히 기업들의 인적성 검사일이 겹치는 날이 있습니다. 결전의 날이죠. 여러 기업에 서류 합격하더라도 결전의 날엔 몇몇 기업을 포기해야 합니다. 운 좋게 오전에 한 곳, 오후에 한 곳 보더라도 하루에 인적성 검사를 볼 수 있는 건 최대 2군데에 불과하니까요. 그마저도 시간이 부족해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부르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전 그 결전의 날에 어느 한 곳에서도 인적성 시험을 보지 않았습니다. 유럽에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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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와 프랑스



한 기업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외 탐방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전 4학년 1학기 때 지원했다 떨어졌었고요. 우연히 대학생 커뮤니티에 보는 데 새로운 기수를 모집한다는 겁니다. 다만 대학생만 지원 가능했습니다. 전 공채 시즌에 떨어지면서 졸업을 늦추고 한 학기를 연장했습니다. 덕분에 시기상 졸업했어야 할 시점에도 학생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지원 조건이 되는 거죠.


다시 지원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합격했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유럽게 가는 일정과 기껏 서류 합격한 기업 대다수의 인적성 시험 일정이 겹쳤습니다. '첫 취업이 내 인생 전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직관을 따르자.' 결국 전 유럽을 택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사람들과 프랑스, 체코를 탐방했고 글로벌 전시회에도 참관했습니다. 기업의 해외 공장에도 가보고요. 인생에 길이 남을 좋은 추억을 남겼습니다. 그러면서도 대기업에 합격했습니다. 최종 합격한 곳은 결전의 날 1주일 뒤에 인적성 시험을 열었거든요.








#5


사실 제 대학생활 중 '대학생활 참 잘 보냈다' 싶은 대표적인 시기가 학업을 연장한 '5학년 1학기(?)' 입니다. 내려놓은 탓에 마음이 제일 편했고 오히려 생각과 행동이 자유로웠습니다. 저를 얽매고 있던 고정관념에서도 기꺼이 벗어날 수 있었고요. 제가 처음으로 강의를 했던 것도 이 시기입니다. 부모님조차 제가 강의를 한다는 걸 신기해하실 정도로 남 앞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낯선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서조차 자유롭기로 했습니다. 해봐야겠단 생각에 그냥 했습니다. 못 할 것 없잖아요. 저는 강의를 해선 안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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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로 참가자를 모아 평일과 주말,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도 못했던 기회까지 얻었습니다. 기업 강의에 나간 겁니다. 딱히 영업을 한 것도 아니고, 강사 프로필을 뿌리고 다닌 것도 아니고, 강사라고 여기저기 알리고 다닌 것도 아닌 데 말이죠. 제가 강의를 하는 모습은 본 기업 담당자를 통해 자리가 마련되었던 겁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운도 좋았고요. 대부분 취업을 위해 다시 영어 점수 높이고 자격증 시험 준비하고 전공 공부를 할 시점에 전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즐겼습니다.

집에 여유가 있어 이렇게 내려놓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취준생 시절을 보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혼자 서울에 올라와 제가 생활비를 벌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학기를 제외하곤 모두 학자금 대출을 받았었고, 그 이자도 제가 갚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을 세우니 어찌어찌 돈을 구할 방법이 생기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학업 연장으로 얻은 시기 덕분에 국내 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던 울릉도, 독도, 제주도로요.








대학 입시, 파워블로그, 유럽 탐방, 강의, 취업... 모두 제 삶에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입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감사한 일들이고,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아쉬웠을 선물들이고요. 이 모든 것들에 공통점엔 '놓아버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합니다. 이렇게 삶이 흘러왔다는 게 말이죠.

다만 여기서 '놓아버림'이라는 건 포기와 방치가 아닙니다. 그 순간 마음의 소리를 따르고 과정에 집중하며 나의 일을 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겁니다.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미래를 상상하되 그 목표와 상상을 이루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랄 때를 보면, 미래에 그 바람이 이뤄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느라 현재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삶을 향한 신뢰와 함께 그런 스트레스, 불안감과 의구심, 꼭 되어야만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흘려보내는 것이 '놓아버림'입니다.

한 번씩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지치게 하고 있는지. 오히려 너무 쥐고 있는 탓에 무거워진 건 아닌지, 그렇게 쥐고 있는 게 나에게 진정 중요한 건지, 그렇게 쥐고 있기에 더 중요한 걸 가질 수 있는 힘을 잃고 있는 건 아닌지. 놓아버렸으면 합니다. 놓아버림으로써 더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행복한 삶과 함께.



바라되 바라지 않고

갈망하되 기다릴 줄 알며

함이 없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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