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이었던 내가 백수라니
반복된 입사 지원 끝에 깨달은 진실이 하나 있다. 채용 결과 화면에서 단번에 "합격"임을 알 수 없다면, 그건 "불합격"을 뜻한다는 것이다.
합격 페이지는 단순하다. "축하해. 너 최종 합격했어. 추가 안내해줄게." 이 세 마디면 충분하다. 반면 불합격 페이지는 복잡하다. 뭔가 말이 많다. 비겁한 변명 때문이다. "저희 회사에 대한 많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귀하의 능력과 자질은 높이 평가되었으나, 제한된 인원 선발 등 여러 가지 제약 조건으로 인해 이번 채용에서는 부득이하게도..."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다. 최대한 돌려 말할 수밖에 없는 인사 담당자의 곤란한 마음을.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을 탈락자들의 마음에 최대한 상처주기 싫은 인사 담당자의 따뜻한 배려를. 그럼에도 이 깊은 고민 끝에 나온 모든 말들이 비겁한 변명처럼 들리는 건, 그만큼 합격이 궁한 취업 준비생의 현실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작은 방구석. 기업 홈페이지에 들어가 버튼을 누렀다.
"채용 결과 확인"
그런데 이상하다. 왜 글자가 많지. 이럴 리가 없다. 그래. 세상에 절대 불변의 법칙이 어디 있겠는가. 분명 예외도 있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글을 또박또박 읽어낼 자신이 없었다. 600페이지짜리 두꺼운 책도 읽어내던 나인데 말이다. 혹시 내가 원하는 단어 "합격"에 앞에 "불"이란 단어가 있을까봐, 혹시 마음 아픈 소식을 마주해야 할까봐.
5초. 잠시 시간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내 몸과 사고가 멈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새로고침은 글자가 많다 싶을 때 진작에 했었고, 지금 화면이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채용 결과였다.
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2학기. 취업난이 또래의 현실이지만 내 현실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내가 백수라니. 귀하의 역량은 출중했다는 변명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완전 불합격이든 간당간당한 불합격이든 불합격인 건 매한가지 아닌가. "자, 너는 성적이 좋으니 하루 8시간 근무, 넌 성적을 보니 하루 6시간 18분만 일해야겠다." 이런 일은 없었다. 취업은 점수에 비례해 근무시간을 나눠주는 할당제가 아니다. 철저히 Yes or No다.
어쩌다 이런 일이 발생한 걸까.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 매 순간 성공 다큐멘터리에 나올 법한 죽을 각오의 노력을 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다. 목숨을 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망치고자 최선을 다한 건 아니다. 다들 멋지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이토록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열심히 청춘을 보내자고 누구 못지않게 다짐했고, 주어진 과제들을 성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초중고 모두 개근상을 받으며 졸업했고,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만행을 저지른 적도 있다. 대학에 와서는 교수님이 대학원으로 살살 꼬시는 우수한 학생은 아닐지언정, 어쨌든 주어진 커리큘럼을 차곡차곡 거쳐 스펙을 쌓고 졸업에 필요한 모든 요건을 충족했다. 평생을 최고의 노력으로 살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도, 그토록 고민하고 스트레스받아가며 학창 시절을 보낸 게 적어도 취업 실패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꼭 목숨까지 걸어야 하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한들 현실이 달라지진 않았다. 이제는 화가 났다. 내가 이런 상황을 겪어야만 하는 현실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 화는 결국 나를 향할 뿐이었다. 이 모든 게 부질없음을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냥 눈물이 났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물이 흐르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
어느새 베개가 촉촉하다 못해 축축해졌음을 느낄 때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콧물은 덜 나와서 다행이다.' '덕분에 눈가는 촉촉해졌네. 안구건조증으로 불편하더니.' 눈물을 흘릴 만큼 흘려서일까.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일까. 조금씩 생각이 정리됐고, 지금 현실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내 삶에 크든 작든 시행착오는 항상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걸어왔고, 어쨌든 예전보다는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의 현실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이것 역시 거부할 수 없는 나의 현실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삶은 진행 중이었다.
내 가슴을 가득 휩싸던 감정들이 하나둘 흘러갔다. 부유 물질처럼 머릿속을 혼잡하게 채우던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었다. 이제 비운의 백수 주인공에서 침대 밖으로 딱 한 발짝은 나아갈 마음을 가지는 순간, 내 안의 장난꾸러기는 옅은 미소와 함께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된 김에 조금은 제멋대로 살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