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 서류에 합격하고도 어딘가는 포기해야하는
누군가는 나에게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괜찮다. 나는 조금은 제멋대로 살기로 했으니까.
취업준비생들에겐 "결전의 날"이라는 게 있다. 지금은 점차 공개채용 제도가 사라지고 있지만, 내가 취업을 할 땐 많은 기업이 공채 시즌에 맞춰 신입사원을 뽑았다. 기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아무래도 많은 일정이 겹쳤다. 그로 인해 결전의 날이 탄생한다. 인기가 많은 주요 기업들의 인적성 시험이 유난히 몰리는 주말의 어느 날이다.
아무리 많은 기업에 서류 합격을 했더라도, 몸이 한 개인 이상 어쩔 수 없이 인적성 시험은 한 곳에서 봐야 한다. 그나마 시험장이 서로 가깝고 운이 좋을 경우 오전에 한 곳, 오후에 한 곳이 최대다. 날이 겹칠 경우 나머진 모두 기회를 버려야만 한다. 막상 인적성 시험에 붙는다고 한들 그 기업의 연이은 면접에서 합격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이게 현실이다.
나 역시 결전의 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취업 재수생으로서 맞이한 공채시즌, 마음을 재정비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기업들에 서류 합격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주요 기업들의 일정이 한 날에 몰렸다. 같은 날 인적성 시험을 보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기업은 어디인가. 나에게 맞는 기업은 어디인가. 그걸 떠나, 안전하게 내가 합격할 가능성이 높은 곳은 어디인가.
그래서 어디를 선택했냐고? 놀랍게도 결전의 날에 몰린 기업들의 인적성 시험장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유럽에 있었으니까.
이 도발적인 선택의 시작은 취업 실패를 받아들였을 때부터다. 현실을 마주하고 감정을 흘려보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생명 연장의 꿈은 몰라도 어쨌든 대학 생활은 한 학기 연장됐다. 다음 공채 시즌까지 대략 3~4개월 정도 남았다. 그때까지 내가 스펙을 높인다면 얼마나 높일 수 있을까. 학점이야 변할 것도 없고, 어학 점수를 높여봐야 몇십 점이다. 자격증을 딴들 이 기간만에 딸 수 있는 자격증이 얼마나 변별력이 있을까. 결국 정량화된 스펙을 갖고 덤벼봤자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었는데, 취업 자체에 대한 내 생각이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적어냈다. "회사원." 이런 답변을 적어 내는 학생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초일류의 회사원이 되어 조직과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숭고한 야망이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딱히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충 회사원은 되지 않을까란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생생한 꿈을 그리지 못할 바에야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떤까. 그 회사원조차 되지 못해 눈물 흘리지 않았나.
딱히 구체적인 꿈은 없었지만 그래도 대략 생각해놓은 진로는 있었다. 열심히 공부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 좋은 기업에 들어간다. 열심히 일한다. 진급하고 결혼하고 행복하게 산다. 끝.
이게 당연히 내가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좋은 기업은 둘째치고 지원한 모든 기업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 혼돈이 찾아온다. 재밌는 건 그 혼돈을 품고 나면 오히려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내 청춘의 목적이 꼭 취업일까. 좋은 기업에 들어가 인정받는 것만이 정답일까. 그 정답을 따르면 과연 행복이 보장되기는 할까.’
그 순간 난 결정했다. 너무 먼 미래를 바라보느라 현재를 등한시하지 않기로. 있는지도 모를 기회를 재느라 손에 잡힌 보물을 놓치지 않기로. 어쩌면 하늘이 내게 선물로 준 마지막 대학 생활 기간일지도 모르니, 이 시간을 후회 없이 재밌게 살아 보기로.
그럼 그동안 모은 돈을 잔뜩 털어서 유럽 여행을 간 걸까.
아니다. 당시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고 생활비도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나로선 돈을 모은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유럽에 갈 수 있었던 건, 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학생 해외 탐방 프로그램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사회공헌활동과 브랜드 이미지 재고를 위해 기업에서 전적으로 비용으로 투자하는 그런 프로그램.
사실 너무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라 일 년 전에 한 번 지원했던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입구에서 바로 떨어졌다. 그런데 취업 실패로 시간이 생기면서 '뭐 재미있는 거 없나'하는 마음으로 대학생 커뮤니티를 살펴보았는데, 마침 이번에 새롭게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것이다. 이건 분명 기회다. 나는 너무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라, 한 번 떨어졌었지만 일 년 만에 다시 도전한다며 열의를 꾹꾹 담아 지원서를 작성했다. 이번에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은 사실이다
운이 좋게도 재도전 끝에 해외 탐방 프로그램에 합격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함께 참여하는 좋은 친구들과 난생처음으로 프랑스와 체코를 방문했다. 해당 기업에서 운영하는 해외 공장도 탐방할 수 있었고, 글로벌 전시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배낭여행으로 떠났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고급 숙소에서 머물며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편하게 관광도 즐겼다.
유럽은 유럽이고, 그래서 취업은 어쨌냐고?
(다른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