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전역 후 복학을 하면서 고민이 있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면서 스펙도 쌓아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을 하니 스펙을 쌓을 시간이 부족했고, 스펙을 쌓기 위한 활동을 하자니 돈이 부족했다. 이 둘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등학생 시절 한 선생님이 말했다. 너희들 대학 가면 괜히 아르바이트한다고 시간을 쏟지 말라고. 그 시간에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 장학금 받는 게 제일 남는 장사라고.
나도 나를 몰라 고민이었지만 이 점 하나는 확실했다. 내가 학과 1, 2등을 할 가능성은 없다는 걸.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인턴쉽?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인턴쉽은 휴학을 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또 다른 방법이 없을까. 그때 눈에 들어온 게 공모전이었다.
공모전은 주최 측이 제시한 주제에 대해 기획안이나 작품을 제출해 평가를 받는 프로그램이다. 준비하는 과정만으로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바가 많고, 내가 가진 아이디어와 기획력이 실제로 사회에서 얼마나 쓰임이 있는지 확인해볼 수도 있다. 입상할 할 경우 상금을 받을 수 있고 때로는 입사시 가산점, 인턴쉽 기회 등 추가 혜택도 얻을 수 있다. 그만큼 경쟁이 심하고 부담되는 일이지만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졸업을 앞두고 공모전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내가 아쉬웠던 건 잘 나가는 누군가처럼 공모전 몇 관왕을 차지했다는 화려한 승전보를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관심을 가지고 많은 정보를 알아봤으나 막상 제대로 도전한 적이 없다는 점이 마음에 남았다.
분명 공모전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배울 게 많을 것이고 입상이라도 하게 된다면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껏 열심히 노력했는데 입상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지 못할 거라는 생각, 내가 진짜 입상은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 결과는 탐나지만 왠지 나와는 거리가 멀거라는 자기 한계, 내 부족한 실력을 마주해야 하는 걱정,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국 난 제대로 도전해보지도 못했다. 아니,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 이런저런 합리적인 이유야 많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나에겐 한 번 시도해보는 작은 ‘용기’가 없었다.
난 이미 커다란 실패를 맛봤다. 취업에 실패한 나에게 공모전에서 떨어지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일 아닌가. 아픈 경험이었지만 덕분에 맷집이 강해졌다. 모처럼 생긴 시간을 활용해 공모전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동기 대부분이 졸업했지만 운이 좋게도 또 감사하게도 휴학으로 인해 아직 졸업하지 않은 친구가 학교에 남아 있었다. 마침 그 친구도 공모전에 관심이 있었다. 함께 도전해보자며 의기투합했다.
우선 지원할 수 있는 공모전들을 조사한 뒤 기간, 주제 등을 고려해 우리가 도전해볼 만한 걸 추려냈다. 한식 프랜차이즈 기업의 마케팅 프로그램 개발과 해외 경제단체의 신규 사업 계획안 수립, 이 두 가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스터디룸 벽면에 각종 아이디어를 적고 자료를 뒤져가며 기획안을 구체화시켰다. 빌딩숲 사이에서 사원증을 걸고 일을 하고 있을 거란 내 상상과 달리 비록 학교 도서관 건물 안에서 학생증을 만지작거리며 있었지만, 나름대로 친구와 함께 세상에 없던 우리만의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주어진 시험 문제를 맞히는 게 아니라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된다는 게 낯설고 어려웠다. 심사를 받을 생각을 하니 더욱 그랬다. 떠오르지 않는 아이디어에 지칠 때가 많았고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걸렸다. 당시 작은 수술을 하나 앞두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수술 날짜가 공모전 마감 일정과 겹쳤다. 처음 생각은 공모전 준비를 일찌감치 마무리해놓는 것이었으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노트북을 들고 병원에 들어갔다. 수술을 마친 뒤 입원실에 누웠다. 자다가 깨면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피곤하면 다시 잠을 청하고, 일어나면 다시 손을 보고, 그러다 다시 잠에 들고. 이 과정을 반복했다. 계획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할 일을 마무리해 정해진 기간 안에 기획안을 제출했다.
공모전과 학교 과제는 확실히 달랐다. 주제도 제출해야 하는 자료의 형식도 모두 생소했다. 그래도 주어진 여건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렇기에 지금의 과정을 통해 분명 성장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애써 만든 결과물이 어떤 평가를 받을까. 혹시 입상까지 하는 건 아닐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임을 알기에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래도 최소한 1라운드는 합격하지 않을까. 물론 객관적인 근거는 없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심사 발표 날짜가 됐다. 결과가 나왔다. 안타깝게도 두 공모전 모두 입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장려상까지는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가차 없이 떨어졌다. 결과만 따지자면 우리가 들인 노력, 시간과 상관없이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취업 재수생인 내 입장에서는 스펙에 어느 하나 도움이 될 게 없는 일이었다. 시간은 흘러갔는데 어디 적어낼 입상 경험 하나 남은 게 없으니 말이다.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맞는 이야기다. 어느 누가 봤을 땐 그냥 뻘짓한 것이다.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결과를 보장받을 수 있는 활동에 투자하는 게 합리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공모전은 불확실한 모험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은 사람이다. 정신을 차리고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다. 누군가 무모한 짓이었다고 해도 뭐라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난 내 직관을 따르기로 했다. “직관을 따랐더니 좋은 결과를 얻었어요” 라는 아름다운 결말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대학 생활에 평생 남을지도 모를 후회 하나는 깔끔히 덜어냈다. 공모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도전해볼걸이라는 후회 말이다. 덕분에 어쩌면 평생 남을지도 몰랐던 공모전에 대한 환상과 아쉬움은 내게 없다.
내면의 목소리를 따른다고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끌림을 따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내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른다면 최소한 마음의 찌꺼기는 남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선택을 했고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바는 다했다. 당장의 스펙이라는 작은 결과물은 얻지 못했지만, 대신 최소한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평생 개운할 수 있는 마음을 얻었다. 이거면 됐다. 비록 남들에게 내세울 결과물은 없을지언정 나 스스로에겐 떳떳할 수 있는 도전이었으니 말이다. 의미 있는 도전을 한 나에게 따뜻한 칭찬 한마디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