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의 길을 간다, 비록 늦더라도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하며

by 이태화 작가


회사로부터 최종 합격 소식과 함께 향후 일정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신체검사, 사전 모임 등이 있지만 어쨌든 본격적인 근무일까지는 한 달 정도 여유가 있었다. 이제 나에게 방학은 없다. 어쩌면 은퇴하기 전까지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긴 자유 시간이 아닐까.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내게 주어진 선물 같은 시간을 마지막으로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껏 해보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던 것들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래. 여행을 가자. 그런데 어디로 가지?’ ‘섬!’ 뜬금없게도 섬이 떠올랐다. 여의도 방문도 섬 여행이라고 인정해주면 모를까. 지금껏 호수나 강 위에 살포시 떠있는 자그마한 섬 외에는 섬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삼면이 바다에 다도해를 가진 나라에 살면서도 섬은 내게 거리가 먼 존재였다. ‘이번에 배 한 번 타봐야겠어. 그럼 어디 가볼까. 음… 이왕 섬에 갈 거면 제일 많이 들어왔고 제일 궁금한 섬으로 가자.’ 답은 명확했다. 제주도! 울릉도! 독도!



입사를 위해 험한 길을 걸어왔다. 그럼에도 입사는 최대한 늦게 하고 싶다. 최종 입사까지 약 한 달. 결코 주어진 기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곧바로 제주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비행기나 배를 타면 됐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럼 버스 타고 갈 줄 알았나. 이 당연한 생각조차 머리를 한 번 거쳐야 할 만큼 제주도는 내게 먼 존재였다. 예전에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가다가 멀미로 큰 고생을 했던 친구가 있었다. 굳이 그 고생을 내가 따를 필요는 없었다. 비행기를 선택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자금이다. 아무리 달력을 보고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여행을 떠날 자금이 부족했다. 얼마 후 약간의 돈이 들어올 게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얼마 후였다. 입사 전까지 시간은 한정돼 있었고 나는 제주도를 지금 가야만 했다. 일단 제주도에 도착만 한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다만 그렇다고 바다 수영을 할 수도 화물칸에 몰래 타는 첩보 영화를 찍을 수도 없다. 아직 고용계약서도 쓰지 않은 회사에 월급 미리 당겨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이대로 귀한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하는가.



부족한 돈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던 찰나, 문득 일말의 희망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비행기를 이용하면 마일리지라는 게 쌓이는데, 그걸로 비행기 티켓을 예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 나도 마일리지가 있을까. 비행기를 탄 적이 있지 않은가. 유럽 말이다. 내 돈 내고 탄 게 아니라 기업의 지원으로 다녀왔으니 발급된 게 없으려나. 그래도 혹시 모른다. 음식점에서 쿨하게 포인트 적립의 혜택을 친구에게 건네듯, 기업도 마일리지를 나에게 건네진 않았을까. 일단 항공사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회원가입은 했었나.



이럴 수가. 나에게도 마일리지가 있었다! 그것도 생각 이상의 마일리지가! 유럽이 장거리 비행이었던 탓에 꽤 마일리지가 쌓인 것이다. 그리고 항공사간의 제휴로 인해 외국 항공사를 이용했음에도 보유 중인 마일리지를 이용해 국내 항공사의 비행기를 예약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제주도까지! 나도 몰랐던 조상님의 선산을 발견하는 사람의 기분이 이러할까. 누군가에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혜택이겠지만 나에겐 삶의 놀라운 선물이었다. 항공 마일리지라는 개념 자체와 거리가 먼 삶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제주도에 갈 수 있다. 매일 학교 수업에서만 듣던 제주도. 각종 특산물과 지리적 특성, 역사적 사건들로만 외우던 대한민국 최대 섬 제주도! ‘그런데 가서 뭐하지. 그래. 자전거를 타자!’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멋진 추억이 되지 않을까. 인터넷에 제주도 지도를 하나 띄어두고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살폈다. 대충 어떻게 여행을 시작하면 되고, 중간에 들릴 만한 곳이 어디인지 파악했다. 그렇게 자료를 찾느라 밤을 새운 뒤 다음 날 오후. 공항으로 향했다. 이 모든 게 섬 여행을 떠올린지 24시간이 되지 않아서다.



졸지에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시작하게 됐다. 사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자전거를 탈 일이 없었다. 아직 자전거를 탈 수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오후 늦게 제주도에 도착했다. 일단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밖으로 나가 떨리는 마음으로 올라탔다. 키다리 인형에 올라탄 느낌이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우왕좌왕 불안했다. 자전거 타기가 이렇게 가슴 졸이는 행위였던가. 자전거를 타는 게 아니라 다리 사이에 자전거를 끼워두고 엉거주춤 걸어갔다. 이럴 거면 왜 굳이 자전거를 끌고 가는가. 그냥 걸어가는 것보다 불편했다.



민망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자전거를 점검하는 마냥 옆에 서서 체인을 돌리고 의미 없이 바퀴를 굴렸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다시 탔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괜히 자전거 안장을 조절했다. 그러기를 반복한 지 수 십 분이 지났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조금씩 일직선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더니 잠시 멈췄다 나아가는 둥 어느새 속도까지 조절할 수 있었다. 10년 넘게 자전거를 탄 적이 없지만 내 몸은 아직 자전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온몸으로 익힌 건 오래간다.



자전거를 탈 수 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날이었다. 몇 가지 간식을 사고 근처 찜질방에서 잠을 청한 뒤 다음 날, 본격적으로 자전거 일주를 시작했다. 제주도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는 자전거 일주. 대충 사진 찍어도 걸작이 나올 풍경. 아름답다. 하지만 사진에 온도는 찍히지 않는다. 때는 6월. 따가운 햇살이 쏟아졌다. 햇살 못지않게 땀도 쏟아졌고 노출된 살갗은 벌겋게 익어 올랐다. 온몸은 자전거 타기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엉덩이 살은 자전거 안장을 잊고 있었나 보다. 분명 푹신한 안장을, 그것도 젤로 된 안장을 선택했으나 익숙하지 않은 반복된 부딪힘에 살이 부어올랐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지날 땐 취업 실패를 받아들일 때만큼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어디 가서 쉴 때도 땅바닥에 앉기 어려웠다. 기껏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청할 때도 엉덩이부터 바로 눕지 못하고, 포복 자세로 엎드려뻗친 뒤 뒹구르르 굴러 몸을 침대 위로 얹혀야 했다.



근력과 지구력도 예전 같지 않았던 걸까. 도중에 똑같이 자전거 여행을 즐기고 잇는 50대 어른 한 분과 20대 초반의 동생 두 명을 만났다. 가는 방향이 같아 함께 라이딩을 했다. 그런데 도저히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 20대 초반에는 나도 그렇게 쌩쌩했어. 50대 어른 분은 전문 라이더야’ 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더라도 너무 뒤처진 내 모습에 답답했다. 장기 레이스고 뭐고 한 번은 따라잡겠다고 다짐하며 있는 힘을 다 쏟아서 페달을 밟았다. 억울하게도 단 한 번도 그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결국 한참 뒤 만난 휴게장소에서 난 도저히 안 되겠다고, 나를 버려두고 먼저 길을 떠나라고 말했다.



‘이 속도라면 정해진 시간 안에 제주도 일주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분했다. 어떻게 단 한순간도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나. 너무 힘이 들었다. 반복된 오르막길엔 차마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옆에서 손으로 잡아끌고 올라갔다. 이런 내 마음과 처지를 모르는지 곱게 차려입은 한 여성분이 분홍색 오토바이를 타고 유유히 나를 지나쳤다. 아주 편안하게 바람과 풍경을 즐기며. 내 마음을 왜 이리 몰라주는 걸까. 이제는 동네 개가 쫓아왔다. 달리면 쫓아오고 멈추면 자기도 멈춰 지긋이 나를 관찰했다. 움직임에 민감한 게 분명했다. 확 도망갈 만큼 속력을 낼 자신이 없었다. 눈치싸움만 계속됐다. 빨리 가야 되는데. 에휴. 이 날씨에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수많은 난관을 뚫고 제주도의 반을 지나서야 알았다. 내가 자전거 기어 조절을 완전히 잘못하고 있었다는 걸. 절대로 속도를 낼 수 없는 기어로 최선을 다해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안 해도 되는 괜한 헛고생 때문에 계획한 만큼 나아가지 못했고 남들은 숙소에서 쉴 시간까지 계속 페달을 밟아야만 했다. 제주도는 서울과 달리 거리가 일찍 어두워졌다. 그런 거리를 달리는 게 때로는 무섭기도 했고,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건가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 복귀 하루 전날 밤, 결국 목표했던 위치까지 도착할 수 있었고 늦은 밤이었음에도 게스트하우스의 남은 한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하루 만에 떠난 여행이라 사전 정보가 부족했다. 자전거 타는 법도 익숙하지 못했고 기어 조절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안 해도 되는 고생을 사서 했다. 동네 개에게 쫓기기도, 뜨거운 햇살과 자전거와의 반복된 마찰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쫓아갈 수 없는 자전거 여행자와 안락하게 나아가는 오토바이 여행자를 보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자문하기도 했다.



짧은 자전거 여행길은 마치 인생 같았다. 내가 가는 길이 맞나 불안했고 갖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잘 나가는 남과 비교했다. 길을 돌아오기도 했고 계획보다 늦춰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엔 내 길을 왔다. 괜히 사서 고생했지만 덕분에 중간중간 생각하지 못한 추억을 쌓았다. 내 대학생활 역시 그랬다.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은 덕분에 얻은 추억들이 있고 결국엔 이렇게 무사히 취업에도 성공했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을 겪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엔 난 나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제주도 자전거 일주가 그랬듯이 내 대학생활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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