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의 마라톤 이야기 9화

그깟 운동화가 뭐라고, 퇴근길 20km를 달렸다

by 이재민 러닝코치

구로에서 반포까지, 물욕이 깨운 나의 러닝 본능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단톡방 친구들이 나이키 이벤트가 열린다며 반포 한강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몇몇은 각자의 위치에서 반포까지 뛰어오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덜컥 손을 들고 말았다. "저도 뛰어서 갈게요!"

당시 내 회사는 구로디지털단지에 있었다. 퇴근 후 반포까지? 지도를 켜고 거리를 계산해 보니 묘한 계산이 섰다. 그리고 그 계산 뒤에는 아주 강력한 동기부여, 즉 **'물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20km를 뛰어야 하는 '비싼' 이유


당시 나이키 이벤트의 상품 라인업은 철저한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였다.

5km 인증: 티셔츠 + 헤어밴드

10km 인증: 5km 상품 + 신발 주머니

15km 인증: 10km 상품 + 조거 팬츠

20km 인증: 15km 상품 + 러닝화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 걸려있던 러닝화는 '페가수스 터보', 가격이 무려 20만 원에 육박하는 고가 라인이었다. 반포는 집(인천)과 정반대 방향이라 어차피 5km만 뛰고 말기엔 아쉬웠다. 그렇다고 15km를 뛰느니, 눈 딱 감고 5km 더 보태서 신발을 노리는 게 남는 장사 같았다.

네이버 지도로 경로를 짰다. 구로디지털단지 도림천 입구 → 안양천 합류 → 한강 진입 → 여의도 → 반포 한강공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km. 1년 전 하프 마라톤에서 죽을 뻔했던 기억은 이미 '신상 운동화'의 광채 속에 까맣게 잊힌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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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하수구 냄새와 어둠의 도림천


저녁 7시, 퇴근과 동시에 구로디지털단지 역 도림천 입구에 섰다. 나이키 런 앱을 켰다. (이벤트 필수 조건이다.) 이벤트 마감은 9시 30분. 내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 30분. 시간당 9~10km 페이스를 유지하면 성공이다. "가보자, 내 신발 찾으러!"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구로디지털단지 아래 도림천 구간은 꽤나 어둡고 습했다. 천장 위로는 지하철이 굉음을 내며 지나갔고, 코끝에는 하수구 냄새가 맴돌았다. 마치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우울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신도림역 근처 습지대까지 묵묵히 달렸다. 사람들도 여기서부턴 대부분 뒤를 돌아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내 신발이 반포에 있으니까.



2막: 안양천의 야경, 그리고 고독한 여의도


안양천에 접어들자 숨통이 트였다. 도림천과 달리 잘 정비된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고층 아파트들이 뿜어내는 불빛이 꽤 근사한 야경을 만들어냈다. 처음 와본 길이었지만 기분이 상쾌했다.

선유도를 지나 한강으로 진입했다. 여기서 고민이 생겼다. 편하게 가려면 조금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22km가 넘을 것 같았다. 나의 목표는 오직 '가성비 20km'. 나는 육교를 건너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사 들고 한강 남단 코스로 진입했다.

이후 여의도 샛강길(남쪽 코스)을 택한 건 실수였다.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켜진 길, 자전거조차 지나가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혼자 달렸다. 이 길이 맞는 건가? 덜컥 겁이 났다. 등골이 오싹해질 때마다 지도를 확인하며 묵묵히 발을 굴렀다.



3막: 기다려라 내 신발, 피 말리는 줄 서기


여의도를 빠져나오자 드디어 그룹 러닝을 하는 무리들이 보였다. "파이팅! 파이팅!" 서로 응원하며 달리는 그들을 보자 안도감과 함께 경쟁심이 발동했다. '저 사람들도 나이키 이벤트 가는 거겠지? 저들보다 늦으면 신발이 없을지도 몰라.'

나는 속도를 높여 그들을 제치고 질주했다. 마침내 반포 이벤트 행사장 도착.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이었다. 급한 마음에 아무 줄이나 섰는데, 알고 보니 거리별로 줄이 달랐다. 5분을 허비하고 20km 인증 줄을 다시 찾아가니, 아까 내가 기를 쓰고 추월했던 그룹 멤버들이 이미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빨리 뛴 것인가...)

내 앞엔 30명 남짓, 이벤트 종료 시간은 10분 전. 피가 말랐다. 20km나 뛰어왔는데 룰렛 한번 못 돌려보고 끝나면 이 무슨 비극인가. 먼저 도착한 단톡방 친구들은 이미 상품을 받은 눈치였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드디어 내 차례. 떨리는 마음으로 룰렛을 돌렸다. 결과는? '조거 팬츠 당첨.'

비록 목표했던 20만 원짜리 신발은 아니었지만, 그날 받은 바지는 튼튼했다. 무려 2024년까지 내 러닝의 동반자가 되어주었으니, 20km의 대가치곤 나쁘지 않았다.



뜻밖의 수확: "어? 나 안 힘든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몸이 너무 멀쩡했다.

1시간에 10km, 꽤 빠른 페이스로 20km를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도 데미지가 거의 없었다. 1년 전, 17km 지점에서 배가 고파 주저앉고 페이서에게 질질 끌려 들어왔던 하프 마라톤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중간중간 물을 마셔서 그랬을까? 아니면 꾸준한 운동 인증 덕분에 나도 모르는 새 체력이 붙은 걸까?

이날의 20km는 나에게 '바지'보다 더 큰 선물을 주었다. 바로 **'자신감'**이었다. '이제 10km는 가볍구나. 다시 하프 마라톤을 뛰어봐도 되겠는데?'

물욕으로 시작한 달리기가 내 안의 러너 본능을 다시 깨웠다. 그리고 이 자신감은,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영역, **'풀코스'**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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