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의 마라톤 이야기 12화

응원하러 갔다가 '풀코스'에 영업당하다

by 이재민 러닝코치

2018 JTBC 마라톤, 3인치 쇼츠의 충격과 42.195km의 전율


'웨어러블 런'의 축제 분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내가 뛰냐고? 아니, 이번엔 응원단이다.

사실 고백하자면, 내가 어제 웨어러블 런에 갔던 진짜 이유는 이 대회, 'JTBC 서울 마라톤' 신청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며 기억의 조각을 맞추다 보니 이제야 인과관계가 명확해진다. 그때는 "아니야, 난 웨어러블 런이 더 좋아"라고 합리화했겠지만, 내심 메이저 대회를 뛰지 못하는 아쉬움이 컸던 모양이다.



3인치 쇼츠, 그 민망함과 비장함 사이


2018년의 JTBC 마라톤은 지금처럼 상암에서 출발해 서울을 가로지르는 화려한 코스가 아니었다. 잠실에서 성남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왕복하는, 언덕은 없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코스였다. (물론 뛰지 않는 나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11월 초, 수능을 앞둔 날씨답게 공기는 차가웠다. 우리 오픈채팅방 멤버들은 두꺼운 롱패딩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풀코스에 도전하는 친구들이 롱패딩 안에 입고 있던 그것. 바로 '3인치 쇼츠' 때문이었다.

남자가 저렇게 짧은 바지를 입는다고? 속옷 아니야?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느꼈는지 친구가 비장하게 말했다. "이게 좀 부끄럽긴 한데, 기록 단축에는 최고래요. 다리가 걸리는 게 없거든요."

'그래... 기록을 위해서라면 부끄러움 따위가 대수겠냐.' 그들의 비장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건, 이날의 충격 덕분인지 나 역시 얼마 뒤 아울렛으로 달려가 3인치 쇼츠를 샀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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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아래 하나 된 우리, 그리고 하염없는 기다림


오픈채팅방 방장 형이 준비해 온 깃발 두 개가 펄럭이자 묘한 소속감이 차올랐다. 우리는 깃발 아래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사진을 찍었다. 풀코스 주자들이 먼저 비장하게 떠나고, 10K 멤버들도 뒤따라 출발했다.

남겨진 나는 응원석을 지켰다. 초대 손님으로 왔던 '비정상회담' 출연진들이 10K를 뛰고 들어오는 모습도 구경하고, 먼저 들어온 10K 멤버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시작된 '기다림의 시간'.

대회 시작 3시간이 지나자 풀코스 주자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2018년엔 지금처럼 러너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앱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주로 끝을 바라보며 내 친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환희와 절망, 그 모든 것을 응원하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모르는 사람들을 응원했다. 42.195km를 달려온 사람들의 얼굴은 실로 기묘했다. 골인 지점이 가까워질수록 웃음과 울음, 환희와 절망이 뒤섞인 표정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거리를 뛰는 걸까? 하프도 죽을 뻔했던 내가 저걸 할 수 있을까?'

그때, 우리 방의 에이스이자 선생님 같은 형님이 저 멀리서 나타났다. 그는 지친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포즈를 취하며 운동장 트랙으로 들어섰다. "와... 개멋있다." 풀코스를 저렇게 웃으면서 완주한다고? 경외심마저 들었다.

반면, 비슷한 실력이라 믿었던 동생은 예상 시간이 지나도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앞설 때쯤, 반쯤 걷고 반쯤 뛰며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조금만 더! 다 왔어! 힘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멤버들, 그리고 먼저 들어온 10K 주자들,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릴 것 없이 박수를 보내고 소리를 질렀다.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어주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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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풀코스를 꿈꾸다


그 뜨거운 응원의 현장 한가운데서 나는 거대한 전율을 느꼈다. '아, 이게 마라톤이구나. 이게 풀코스의 문화구나.'

춘천에서의 10km가 '함께 달리는 즐거움'을 알려줬다면, 잠실에서의 응원은 나에게 **'도전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단지 바라만 봤을 뿐인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도 풀코스를 뛰고 싶다.' 막연한 호기심이 아닌, 진심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마라톤에 미쳐버린 지 하루 만에, 나는 내 인생의 다음 목표를 '풀코스 완주'로 정해버렸다.



굳게 닫힌 철문, 그리고 예고된 고난


그 뜨거운 응원의 열기에 취해서였을까. 도저히 집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다리가 근질거려 견딜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평소 운동하던 트랙으로 달려갔다. 당장이라도 42.195km를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철커덩."

트랙의 육중한 철문은 이미 개방 시간이 지나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는 자물쇠를 보며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아... 시작부터 문전박대라니.'

어쩌면 저 단단히 잠긴 철문은, 앞으로 내게 펼쳐질 험난하고도 고통스러운 풀코스 도전기를 미리 예고하는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내 가슴속엔 끌 수 없는 불이 지펴져 버렸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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