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의 마라톤 이야기 13화

17만 9천 원짜리 날개를 달고, 맨발로 집에 오다

by 이재민 러닝코치

나의 첫 마라톤화 '줌플라이'와의 피 튀기는 첫 만남


JTBC 마라톤 응원을 다녀온 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마라톤은 템빨(아이템 빨)이구나."

그전까지 내가 신던 러닝화는 나이키의 '프리런(Free Run)'이었다. 이름에 '런'이 들어가니 당연히 러닝화겠거니 하고 샀던 녀석이다. 하지만 2018년 당시 유행하던 '베어풋(Barefoot, 맨발)' 콘셉트의 이 신발은 얇고 유연한 밑창으로 발 본연의 감각을 깨우는 게 목적이었다. 문제는 내 발이 '평발'에 가까운, 기능적으로 그리 훌륭하지 못한 발이라는 점이었다.

쿠션도 없는 신발을 신고 하프 마라톤을 뛰고, 매주 대회를 나갔으니 발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뛸 때마다 발바닥이 아파왔지만, 나는 그게 훈장인 줄 알았다. "장거리를 뛰었으니 아픈 게 당연하지. 쉬면 낫겠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때의 미련함 덕분에 나는 족저근막염지간종이라는, 러너들의 고질병을 얻었다. (특히 지간종은 아직도 풀코스를 뛸 때마다 도지는 지독한 친구가 되었다.)



"줌플라이 대란! 반값 세일이래요!"


어느 날, 평화롭던 오픈채팅방에 비상벨이 울렸다. "나이키 팩토리에서 줌플라이가 50% 할인한대요!"

사람들은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매일 아울렛을 돌며 재고 상황을 생중계했다. 정보를 들어보니 회사 근처인 가산디지털단지 W몰(W-MALL) 나이키 팩토리에도 물건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퇴근하자마자 구로디지털단지에서 가산까지 약 3km를 달려갔다. (쇼핑하러 뛰어가는 열정이라니.)

매장에 들어서자 영롱한 자태의 **'줌플라이'**가 나를 반겼다. 신발에 발을 넣고 일어선 순간, 나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어?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든데?" 쿠션은 구름처럼 두툼했고, 바닥은 둥글게 깎여 있어(로커 구조) 가만히 있어도 몸이 저절로 앞으로 튀어 나가는 느낌이었다.

"와... 자기들만 이렇게 좋은 거 신고 뛰었단 말이야? 이건 반칙이지!" 바로 옆에 '국민 러닝화'라 불리는 페가수스 35가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가 179,000원. 할인가 89,500원. 스쿼시 라켓 이후 내 인생에서 스포츠용품에 투자한 가장 큰 금액이었다. 카드를 긁으며 다짐했다. '이제 이 녀석과 함께 풀코스를 정복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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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은 3km, 고통은 그 후로 쭉


며칠 뒤, 드디어 새 신발 개시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줌플라이 끈을 조여 매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집에서 3km 떨어진 인천 아시아드 보조 경기장. 통통 튀는 반발력을 느끼며 기분 좋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기장에 도착할 때쯤, 발뒤꿈치에서 불길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어라? 조금 따가운가?' 신발을 벗어보니, 아뿔싸. 뒤꿈치 살이 완전히 까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발목 뒤쪽 뼈가 유난히 튀어 나온 편이다. 군대 시절, 행군만 하면 군화 속이 피범벅이 되어 항상 절뚝이며 복귀했던 그 저주받은 뒤꿈치가 또 말썽을 부린 것이다. (알면서도 '설마 비싼 신발인데' 하며 밴드를 안 붙인 내 탓이다.)

다시 신발을 신으려 했지만, 스치기만 해도 비명이 나올 만큼 쓰라렸다. 구겨 신을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새로 산 영롱한 줌플라이를 손에 들고, 맨발로 아스팔트 위를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3km. 보도블록의 차가운 냉기와 작은 돌맹이들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나는 생각했다. '대회 날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비장했던 나의 첫 마라톤화 테스트는 '맨발 귀가'라는 처참한 엔딩으로 끝났다. 줌플라이와의 첫 만남이 피로 얼룩져서였을까, 이후로도 나와 줌플라이의 악연은 꽤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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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50분의 굴욕


그 사이, 춘천마라톤 공식 사진이 '포토스포츠' 사이트에 올라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배번호를 검색했다. 수많은 사진 중 내 눈을 사로잡은 한 장. 결승선을 향해 비장하게 뛰는 모습? 아니다. 터덜터덜 걸으면서 태연하게 카톡을 보내고 있는 모습.

"우리 들어갑니다! 사진 찍어주세요!"라고 톡을 보내던 그 순간이 아주 적나라하게 박제되어 있었다. 풀코스 러너처럼 보이는 비주얼로 걸으면서 카톡이라니. 물론, 그 사진은 장바구니에 담지 않았다. (돈 주고 사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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