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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연 Aug 17. 2019

밤을 여행하는 자들의 수호자

문나이트 (2014~2018) 리뷰

새삼 내가 문나이트를 읽다니 세상 살고 볼 일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포스팅을 계기로 우연하게 집어들었는데, 생각치도 못하게 재밌었단 말이죠. 근데 그냥 단순히 재밌다!라고 넘어갈 게 아니라, 다른 책들과는 아주 확연하게 구분되는 문나이트만의 특색이 있었어요. 그걸 포스팅으로 정리해서 소개해드리면 더 많은 분들이 이 재밌는 책을 실수로라도 놓치지 않고 즐기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몇 자 적어봅니다.

아메코믹은 작가가 수도 없이 많고, 또 작가별로 주인공의 캐해석이 조금씩 달라지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죠. 하나의 캐릭터를 각종 다양한 면모를 갖은 스타일로 만나볼 수 있어서 단맛 짠맛 매운맛 내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하차해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면 그 맛있는 걸 더는 만나볼 수 없다는 게 단점. 그리고 교체된 작가가 내 캐해석과 안 맞는다거나 도리어 끔찍한 캐붕을 내거나 할 수 있다는 게 매우 크나 큰 단점이에요.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만화랑은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지요.


2014년 리런치되어 지금까지 연재중인 <문나이트>는 이런 미국만화의 특징을 정말 최대한 살린 시리즈예요. 여태 읽은 것중에 <문나이트>만큼 작가의 교체를 절감한 책이 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거북하거나 불쾌하다기보다는 '문나이트'의 캐릭터성에 기막히게 잘 맞아 떨어지고, 어떻게 보면 또 자연스럽게 납득이 될 정도라는 게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했어요. 작가들끼리 일부러 이런걸 노리고서, 아주 그냥 작정하고 다른 스타일로 쓴 걸까 싶을 정도로요.


'문나이트'라는 캐릭터의 정수를 간단하게 설명해보라 한다면 코믹스 서문에 달린 Recap을 인용하면 딱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래 문장의 키워드를 통해 캐릭터의 핵심을 살펴봐요.


1)용병 마크 스펙터는 2)이집트의 고대신 콘슈의 석상 아래서 숨을 거두었다. 달의 신의 은총을 받아 3)부활한 그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신의 모습을 취했다. 4)완전히 미쳐버린 그는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이것은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1)에서는 마크 스펙터가 각종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싸움에 능하다는 걸 알 수 있죠. 이거는 슈퍼히어로 장르라면 기본으로 깔고 가는 부분이지 않을까 해요. 2)이제 여기서부터 엄청나게 흥미로워집니다. 무려 이집트 신화가 언급되는데, 달과 복수의 신 콘슈가 등장해요.  3)죽음 후에 부활했다고 하니 콘슈가 직접적으로 신의 권능을 행사해 마크 스펙터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는 뜻이겠네요. 4)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문나이트라면 가장 널리 알려진 특징은 이 4번일 것 같습니다. 마크 스펙터는 다중인격을 가진 정신질환자라는 사실말이에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문나이트>를 맡은 작가는 총 다섯명입니다. 이 다섯명이 위의 4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개성을 담아 맛깔나게 책을 써놓았는데요. 이게, 와, 대단하다니까요. 각자가 어떻게 그렇게 다른 해석을 해놓았는지! 근데 그게 물과 기름처럼 겉돌지 않고 하나의 앨범의 A사이드 B사이드를 즐기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아요. 분위기는 다르지만 분명 같은 앨범의 노래라는 건 알 수 있도록 말이에요. 문나이트만의 어떤 공통된 줄기는 유지했다고 보면 될까요. 어찌됐든 작가별로 각각 어떤 지향점을 두고 책을 썼는지 조금씩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어요.


제목에는 <문나이트>(2014-2018)이라고 써놔서 4년동안 꾸준히 연재가 진행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3개의 시리즈가 몇달의 텀을 두고 캔슬되었다가 리런치되기를 반복했거든요. 정확히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아요.

첫번째 <문나이트>(2014-2015) #1~17 : 워런 엘리스, 브라이언 우드, 컬렌 번 씀

두번째 <문나이트>(2016-2017) #1~14 : 제프 르미어 씀

세번째 <문나이트>(2017-2018) #188~200(레거시 통산넘버링) : 맥스 베미스 씀


스파이더맨 같이 메인시리즈가 800호를 돌파한 초특급 간판 캐릭터를 파다가 이렇게 소소한 스케일의 캐릭터를 읽어보려고 하면 징검다리처럼 드문드문 연재된 모양새가 참 시원섭섭하다니까요. 몇 편 되지도 않는 거 금방금방 캔슬시키고 있어 나쁜놈들ㅠㅠ



첫번째 <문나이트> (2014-2015) 시리즈 

#1~6 워런 엘리스 씀, 데클란 셸비 그림, 조디 벨라에르 채색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저는 2014년 이전에 나온 <문나이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을 드려야될 거 같아요. 워런 엘리스의 <문나이트>가 저의 첫 입문작이었다는 점 짚고 시작할게요. '런'이라고 표현하기도 무색하게 달랑 6권뿐이지만 편의상 엘리스런이라고 표기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분위기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에 좋아하던 캐릭터는 말 많은 떠벌이들이었고, 또 나래이션 위주의 책을 즐겨 읽던 터라서, 이런 절제되고 무거운 분위기가 새삼 새롭더라구요. 전체적으로 <문나이트>는 기본적으로 '말하기'보다 '보여주기'가 두드러지는 시리즈였어요. (아마 스타트를 끊었던 엘리스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발 주자들도 따라가지 않았나 싶어요) 나레이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한발짝 멀리 떨어져있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극이 진행되는데요. 직접적인 심정 묘사를 피하고 어두운 밤의 더러운 골목을 그려낸 패널들이 음습하고도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형성해서 마치 어떤 범죄수사를 뒤쫓는 현장르포를 읽는 기분이 듭니다.

주인공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의도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좀처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attachment를 형성할 틈이 없죠. 일반적인 '솔로타이틀'이 대개 하나의 길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걸어가는 주인공을 묘사한다면, 엘리스런에서는 길은 없어요. 보도블록 파편 뿐이죠. 사건이 먼저 있고 그곳에 주인공이 있었을 뿐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생각해보면 실제 현실이 그렇잖아요? 먼저 사건이 터지면 현장에 해결사가 호출되어 달려가는 거니까요. 인물보다도 사건을 앞세우는 엘리스런은 옴니버스 형식을 효과적으로 채택해서 매 이슈마다 각기 다른 사고들을 다루고 있어요. "주인공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전면에 대놓고 던져주기보다, 주인공이 갖가지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을 통해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셈이죠. 그래서 추측하고 짐작하는 재미도 있더라구요.


아무래도 독자에게 알려주는 정보가 적다보니까 읽으면서 의문점이 참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오리진'이나 '옛날 인간 관계' 같은 것들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어요. 질문의 방향은 오로지 사건이 펼쳐지는 무대, '현재'로 고정되기 마련이더라구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경지식이 필요없는 책이라는 의미로 말이에요.

이슈 #1을 여는 첫번째, 두번째 페이지입니다. 얼핏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곱씹어보면 단맛이 배어나는 멋진 페이지예요. 뜻밖에도 주인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제3자, 블로거 혹은 기자로 보이는 익명의 엑스트라 여성이 시리즈의 포문을 열고 있어요. 전화상의 대화를 통해 Recap의 서문을 보충해서 (원래대로라면 Recap을 읽지 않는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최소한의 정보를 풀어주고 있는 거예요.


1)먼저 문나이트가 오랜만에 뉴욕에 돌아왔다고 알려줍니다. 마블의 독자에겐 익숙하다 못해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뉴욕이에요. 2)최근에 문나이트가 L.A.에서 목격된 바가 있다는 부분은 아마 충성스러운 독자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직전 시리즈의 행보겠죠. 3)문나이트의 정신질환에 대해서 언급하는 말투는 정말이지, "이 책의 주인공은 미쳤다"라고 쾅쾅쾅 대못으로 때려박는 수준입니다. 4)Recap의 오리진도 제3자인 화자의 입을 빌려 부연설명해주고 있는데, 내가 전해듣기로는("I was told")이라고 콕 찝어 언급하기 때문에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져요. 아무리 부활이 밥먹듯이 일어나는 마블 유니버스라고 하더라도, 달의 신에 의해 부활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건 사실이잖아요. 더군다나 주인공이 미친 사람이라니 말 다했죠. 다만 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부분은 오리진 이야기에 한해서 적용됩니다. 화자는 블로거 혹은 기자, 즉 공신력이 있는 직업이니까요. "미친 사람이야"라고 단호하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부분은 분명 믿을만하죠. 그래서 저는 주인공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계속해서 의심하면서 책을 읽게 됐어요. 실제로 이 부분을 핀포인트 잡아서 이야기를 진행시킨 후속 작가도 있구요. (후술합니다)

아 정말, 거듭 말하지만 첫페이지부터 예술이에요. 어떤 여성의 방안에서 출발했지만 곧이어 창밖을 내다보는 여성의 시선을 따라서 독자는 자연스레 뉴욕이라는 거대한 공간으로 나아가게 돼요. 겨우 네모칸 3개만에 아침, 낮, 밤을 순식간에 지나쳐 뉴욕 곳곳을 가로질러 날아오릅니다. "밤의 뉴욕"이라는 시공간으로, 이야기의 본무대로 진입한 거죠. 여인의 모습은 페이지 상에서 금방 자취를 감춰요. 캐릭터성은 휘발되고 목소리만이 말풍선으로 남았습니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패널 바이 패널로 점점 익명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속의 사건 현장에 가까워져요. 말그대로 풍문으로 들려오는 이야기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는 여성 화자가 어떻게 보면 독자와도 비슷한 위치가 아닌가 싶어요. 여성이 노트북 모니터를 통해 문나이트의 사진을 보듯이, 독자인 저도 아이패드 화면을 통해 이 책을 읽고 있죠. 여성이 문나이트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어도 문나이트에 전해 들었다는 것은, 지금 독자의 경험을 그대로 풀이한 거구요. 이 코믹스 정말 첫장부터 미쳤죠?!?! 이보다 완벽한 인트로를 못 봤어요. 짜릿해요. 대단한 책이에요.

<문나이트> 시리즈만의 독보적인 특징으로는 흰색의 쓰임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리즈의 최대 매력이에요. 흰색이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잘 쓰였습니다. 설정상 주인공 성격이 그래요. 자신이 다가가는 것을 악당이 눈치채길 바라기 때문에 눈에 띄는 하얀 옷을 입는다는 미치광이. (반대로 배트맨은 어둠속에 잘 녹아들기 위해 효율 좋은 검은 옷을 입고 있죠.) 제가 그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기엔 아는 게 상당히 없지만, 배경과 주인공을 비교하면 음영대비가 상당히 다르다는 건 느낄 수 있거든요. 눈이 멀 것만 같은 새하얀 #FFFFFF 진백색 코스튬은 더러운 뒷골목의 잿빛에도 망나니 유령의 푸른빛에도 피나 화약에도 물들지 않아요. 인물이 배경 속에 녹아들지 않다보니 속세와 명료하게 구분되고 구별되는, 이쪽과 저쪽을 오고 가는 유령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심지어는 패널들을 감싸고 있는 페이지의 하얀색 여백과도 으레 이어져 있어서, 마치 여백이 문나이트라는 캐릭터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위에서 엘리스런이 사건을 중점적으로 쓰여진 책이라고는 했지만 이렇듯 주인공이 페이지 여백, 나아가 작품 전체를 확실하게 통제하는 인상을 분명하게 받았습니다. 주인공이 비범한 존재이며 '콘슈'라는 초월적 신의 경지에 다다른 인물이라는 걸 확실하게 하고 있어요. 그 증거로써 아무리 다쳐도 쓰러지지 않고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잖아요. 문나이트는 행동만 따져보면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인물이지만, 말쑥하게 정장을 빼입어서 절제력과 통제력과 어떤 고고함마저 겸비한 Civilized gentleman이라고도 보인다는 점이 너무나 아이러니해요. 정말이지 컬러리스트 조디 벨라에르에게 정말 지극한 찬사를 보냅니다. 컬러리스트의 위대함을 느낀 건 이 시리즈가 처음이었다구요. 여러모로 최초의 타이틀을 여럿 가져가는 <문나이트>였네요. 이쯤하면 다들 눈치채셨겠죠... 저... 문나이트 엄청 사랑하게 됐다는거... 크윽... 라이팅이 좋으면 뭔들이에요 진짜...



#7~12 : 브라이언 우드 씀, 그렉 스몰우드 그림, 조디 벨라에르 채색

엘리스와 셸비 콤비는 원래부터 6편까지만 담당하고 하차할 계획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다음 타자로 브라이언 우드가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작가가 달라지면 뭐다? 스타일이 달라진다. 옴니버스 형식이었던 1~6편이랑은 다르게 7편부터는 위에서 언급했던 '하나의 길을 걷는 주인공'을 그려냅니다. 처음 중간 끝이라는 완결성을 갖춘, 보다 정통적인 스토리아크를 써냈단 뜻이죠. 거기에다가 엘리스가 남겨놨던 떡밥을 이것저것 주워서 훌륭하게 써먹은 탓에, 같은 작가가 쓴 거라고도 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이어졌습니다. 신화적 모티프를 가장 눈에 띠게 강조했던 엘리스와는 달리, 정신질환자라는 키워드에도 눈길을 돌렸던 우드였어요. 엘리스런의 마크 스펙터는 굳건하고 묵직하고 강인한 신의 대리자와도 같았지만 우드런의 마크 스펙터는 '콘슈의 가호'를 잠시동안 잃을 정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거든요. 엘리스런을 돌이켜보면 '문나이트가 아닌 마크 스펙터'는 결코 나오지 않았네요. 이제는 나온다. 마크 스펙터의 약점이 나온다!

엘리스런 1편 마지막에서 마크 스펙터가 뉴욕에 오기 전에 정신과 상담을 받는 장면이 나와요. 의사는 "당신은 미친 것이 아니다. 고대신 콘슈가 당신의 뇌를 지배하여 그런 증상이 생긴 것. 다중인격장애를 가진 것은 맞지만, 콘슈에 관해선 당신은 미친 게 아니다." 라고 음습하고 모호하게 말을 했었는데요. 그 때문에 전반적으로 2014년 시리즈는 콘슈라는 신적 개념은 실존한다를 전제로 깔고 가고 있어요. 의사는 주인공의 색상, #FFFFFF 진백색을 함께 띠고 있는 작중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처음 등장했을 때 '어 뭐지? 문나이트의 또 다른 인격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고. 그냥 정신적 코드를 공유한다는 의미였는지 '테라피 세션'을 통해 서로의 심상 세계를 멋지게 넘나들며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이슈가 있어요. 그렉 스몰우드의 작화는 뭐랄까, 목탄을 쓴 것처럼 거친 잉크선과 센스 넘치는 패널 구성이 매력인 것 같아요. 정장/갑옷/망토 세 가지 의상이 교차되면서 장소의 비현실성과 인물의 다중성을 드러낸달지, 대충 fancy해보이는 단어를 늘어놓은 것만 같지만 그렇습니다.  


엘리스런은 옴니버스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중구난방에 난잡해질 수도 있었지만 필력이 워낙에 좋아서 그런 불상사는 피했어요. 정돈된 맛은 없어도 어떤 공통속성을 가진 그룹이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깜짝선물처럼 느껴졌거든요. 반면 우드런은 나름대로 정돈을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생각만큼 큰 성과는 보진 못했다는 생각이에요. 1편 초반에 나온 여성 기자 캐릭터를 다시 등장시켜서 갈등을 해소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장치로 썼는데, 꽤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웠어요. "어떻게 나를 믿느냐"라고 마크에게 묻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메타적으로 이슈 1편을 증거로 들 수 있겠죠. 당신은 이미 1편에서 능력있는 정보통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이에요. 그래도 의사 캐릭터에 대한 반전이 뒷심이 부족했다는 생각이에요. 정신질환이라는 과학적 접근과 콘슈라는 신화적 접근 그 어드메에서 약간 갈팡질팡해버린 기분이 드네요.



#13~17 : 컬렌 번 씀, 론 악킨슨·저먼 펄란타 그림, 댄 브라운 채색

2014년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컬렌 번은... 좀 실망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컬렌 번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지만(데드풀 갖고서 리미티드 시리즈를 공장처럼 찍어낸다는 그런 나쁜 이미지가 있어서) 앞선 두 작가의 책들과는 꽤나 이질적입니다. 키워드는 비슷하게 유지했어요. 마찬가지로 콘슈의 신화적 면모를 상당히 강조했거든요. 하지만 만화의 렌즈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보여주기 위주의 만화가 갑작스레 말하기 방식으로 전향해버려서 당황스럽다 이거지요. 콘슈와 마크의 1:1 대화가 훨씬 많아졌고, 전체적으로 마크가 말수가 많아졌어요. 심지어는 마크가 극중 아무개 타인에게 "콘슈"에 대해서 언급을 하기까지 하더라니까요. 직접적인 묘사가 많아지니까 제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그만큼 줄더라구요. 무엇보다도 컬러리스트가 변경된 게 커요. 벨라에르가 채색을 도맡았을 때에는 문나이트의 백색이 뚜렷하게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와서는 그게 대부분 무너져버리고 말아요. 아쉬워라. 

그래도 나름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려고 애쓴게 보이긴 했어요. 콘슈의 또 다른 대리자를 등장시킨다든지, 콘슈의 보호를 받는 "밤의 여행자"에 대한 해석을 거꾸로 해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달이 수도 없이 모습을 바꾸듯 마찬가지로 콘슈도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서술합니다. '아누비스'를 가볍게 언급하는 것으로 이집트 신화 세계를 조금 더 확장해준 것도 하나의 업적이라고 쳐줄까요. 그럼에도 문나이트만의 어떤 특별한 매력을 평범한 슈퍼히어로 책으로 망쳐버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총정리하자면 신화의 색을 입힌 액션만화라고 표현해보겠어요.


엘리스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문단에 비해서 다른 작가들에 대한 코멘트가 턱없이 적죠. 아무래도 엘리스런이 그림을 통해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많이 열어놔서 이런저런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 것 같아요. 물론 포스팅을 길게 쓰다보니 후반으로 갈수록 지치는 부분도 있긴 하네요 ㅋㅋㅋ ㅠㅠㅠ



두번째 <문나이트> (2016-2017) 시리즈

제프 르미어의 <문나이트>도 참 할 얘기가 많은데 이거는 절대로 스포일러를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절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르미어런은 'Welcome to New Egypt' 4부작, 'Incarnations' 4부작 'Death and Birth' 5부작, 이렇게 세 개의 스토리아크로 구성되어있는데, 꽤나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어요. 르미어런에서는 정신병원에 갇힌 마크 스펙터가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일(=독자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정신병자인 당신이 머릿속으로 꾸며낸 허구에 불과하다" 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과연 마크는 정말로 단순히 미친 것에 불과한 걸까요? 아니면 어떤 빌런의 수작에 빠진 걸까요?


이전 시리즈에서 신화적 요소를 부각한 것과는 달리, 르미어는 문나이트의 정신질환자라는 키워드를 만면에 내세우며 믿을 수 없는 주인공이라는 부분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주인공도 독자도 알지 못해요. 정말 죽도록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코믹스예요. 특히 'Incarnations' 스토리아크에서는 게스트 아티스트 세 명을 추가로 섭외해서 각기 다른 그림체로 다중인격 3명의 이야기를 왔다갔다 교차해서 진행하는데요. 작화가 바뀌는 그 사이의 바운더리를 오묘하고도 스무스하게 처리해서 작화가들의 천재적인 연출 센스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걸 굳이 이슈 4개를 소모하면서 질질 끌 내용인가 의문이 들긴 했어요. 조금 낭비였다는 의견이에요. 만약에 한 달에 한 권씩 온고잉으로 달리는 입장이었으면 답답해서 미쳐 죽었을 거 같아요 ㅋㅋㅋ


여기서 잠깐!

르미어런은 결말을 알고 보는 거랑 모르고 보는 거랑 천지차이입니다.


직접 읽어보고 싶으신 분들은 지금 글을 넘기는걸 추천해요.


마음을 정하셨나요?


결말 스포일러해도 괜찮겠어요?


좋아요!


그러면 마저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던 르미어런. 무엇이 현실인지 알지도 못하게 밑바닥 없이 완전히 붕떠버린듯 극도로 불안정했던 이 시리즈는 마지막 아크의 마지막 이슈에 가서야 갈등을 해결하면서 진정한 의미를 갖게되는 거 같아요. 결국 마크 스펙터의 오리진에 크나 큰 레트콘이 이루어졌다는 게 핵심입니다. 초월적 힘을 지녔다고 묘사되었던 '콘슈'라는 신은 사실 진짜 신이 아니라 마크 스펙터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광기로서의 인격체일 뿐이었다는 거지요.


마크 스펙터는 콘슈와 만나서 다중인격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다중인격 질환을 갖고 있었다고 해요. 결과적으로 마크는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하나의 도피구로 이용하던 '달의 신 콘슈'를 없앰으로써 잔인한 현실을 직면하기로 결정합니다. 고통과 고민 끝에 자신의 의지로 콘슈를 없애자마자 뉴욕의 정경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연출 정말 좋죠. 눈을 감고 달빛을 받으며 현실을 만끽해보는 마크 ㅠㅠㅠ 어떤 성취감 만족감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표정 묘사예요. "아픈 상태", "치료를 요하는 상태"를 나타내던 반창고를 떼어냄으로써 거기서 벗어났다는 걸, 정신적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섬세한 터치도 훌륭하구요. 무엇보다 비가 내립니다. 정신병을 포용했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가 마법처럼 사라지진 않잖아요. 현실은 잔인하고 고달플 거라는 걸 암시하는 듯해요. 그걸 위해 해결사 문나이트가 필요한 거겠죠? 하나의 광시곡을 읽는 기분이었어요. 멀리 돌고 돌아서 힘들긴 했지만 제법 좋은 책이었습니다.



세번째 <문나이트>(2017-2018) 시리즈

베미스런은... 언리미티드로 읽었기 때문에 첫아크 'Crazy runs in the family'밖에 읽지 못했어요. 그 소감은... ㅋㅋㅋㅋㅋㅋ 웃음이 나오는 소감입니다. 일단 르미어런의 레트콘 설정을 그대로 이어서 가져왔어요. 그래서 마크의 여러 인격들이 (죽은줄만 알았던 콘슈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캐릭터'로써 등장하는 모양새입니다. 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말이에요. 머릿속에서 죽어라 레슬링을 벌이기도 하고 말이에요. 웃겨 죽겠어.

르미어런에서 등장했던 정신과의사가 재등장해주면서 달의 신의 콘슈의 반대로 태양의 신 라의 대리자가 메인 빌런으로 나오는데, 본디 가지고 있던 뛰어난 신체 능력을 정신질환으로 인한 그릇된 믿음으로 발현시킨다는 골때리는 인물입니다. 뭐랄까. 그 막 온힘을 다해서 진지해지려고 하는데, 이게 너무 코믹스적인 silliness가 가득해버려서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그런 거 있잖아요? 베미스런이 딱 그래요. 마냥 무겁고 딱딱하던 이전작보다는 좀 많이 가볍고 캐쥬얼한 분위기로 진행됩니다. 얼마나 가벼워졌냐면...

숨겨진 딸 등장

흔한 아침 드라마.jpg

빙다리 핫바지

흔한 싸움 시퀀스.jpg

그거 내 그네거든요?!

흔한 코믹 릴리프.jpg


이전 시리즈들과는 쌍당히 달라졌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재밌어요. 계속해서 따라가며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깊이는 덜해도 그만큼 부담없이 즐기면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생겼잖아요. 마크가 귀엽고 콘슈가 맛있습니다. 콘슈마크 한 입 하세요.


ㅇㅏ 포스팅 어떻게 마무리하지? 예상보다 포스팅이 너무 길어져서 뭐라고 맺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작가별로 이렇게까지 차이가 심해지는 코믹스는 또 못 본 것 같습니다. 작가들마다 '미친자'라는 속성을 고심해서 만든 게 보여서 좋았고요. 직접 읽어보시면 더 재밌을 거예요.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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