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스의 세상은 넓어도 너무 넓어서, 한 사람의 한정된 돈과 시간으로는 그 모든 영역을 탐방하기에는 역부족이에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전략은 '한 우물만 판다'. 처음에는 오로지 피터 파커라는 캐릭터 하나만을 잡고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피터 파커의 친구, 가족, 동료 이런 식으로 발을 넓혀가며 스파이더맨 계통의 모든 캐릭터를 도장깨기하듯 파고들었지요. 그러면서도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에만 집중하는 노선을 꾸준히 유지해왔습니다.
처음부터 뭔 혓바닥이 이렇게 기냐구요. 제가 스파이더맨을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에는 수박겉핥기 문외한이라서, 캡틴 마블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하하^^;;;) 그런 이유에서 MCU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매번 극장에서 꼬박꼬박 관람을 하곤 해도, 관련 포스팅을 쓰지 않는 거예요. 스파이더맨이 아니면 딱히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니 포스팅을 쓸 이유가 없는 거죠 뭐...
그런 제게, <캡틴 마블: 더 용감하게, 더 강인하게> #1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입문서였어요!
낯선 캐릭터의 책을 집어들 때 제가 가장 먼저 보는 건 글작가 라이터의 이름입니다. 조디 하우저가 누구냐.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리뉴 유어 바우>의 후반시즌을 맡아준 라이터이자, 처참했던 [스파이더겟돈]에서 진흙 속의 진주와도 같았던 <스파이더걸즈>를 써준 작가. 뿐만 아니라 기대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는 <스타워즈: 에이지 오브 리퍼블릭> 시리즈를 써내고 있는 작가입니다.
요약하자면 조디 하우저는 제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에요. 여성 작가가 쓰는 여성캐릭터만큼 좋은 게 어디있겠어요. (<리뉴바>와 <스걸즈>에서 검증된 바 있습니다!) 게다가 함께 코믹스 덕질하는 트친님이 먼저 읽고서 아 이거 재밌다며 추천 도장을 땅땅 찍어주셨으니, 암만 제가 전에 캐롤 코믹스를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한들, 이쯤 되면 "WHY NOT?" 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 있죠. 그래 좋아! 나도 한번 캡틴 마블 입문해보자!
마블편집부는 MCU라는 커다란 마차에 훌쩍 탑승해 함께 발맞춰 따라가기를 곧잘 합니다. 3월달 '캡틴 마블' 영화 개봉에 앞서 <라이프 오브 캡틴 마블>이라는 5부작 코믹스를 통해 캐롤 댄버스의 삶을 돌아보며 오리진을 정비하고 (레트콘이 있었다는 뜻!) 온고잉 솔타 <캡틴 마블>(2019~)로 산뜻하게 리런치 시동을 걸었지요.
<캡틴 마블: 더 용감하게, 더 강인하게>는 그와는 상관 없는 곁다리로 나온 외전이에요. 바야흐로 솔로무비 개봉철입니다. 캡틴 마블이라는 캐릭터에 가장 이목이 집중된 이때, 온고잉 컨티뉴이티랑은 상관 없이 다른 내용을 담은 원샷 단편쯤 휙휙 던져줘서 나쁠 건 없잖아요? <캡틴 마블: 더 용감하게, 더 강인하게>는 그런 책이었어요. 캡틴 마블에게 관심은 있는데, 온고잉 솔타를 진득하게 달리긴 또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가볍고 소프트한 최적의 입문서. 따악 저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었죠!
내용은 꽤 간단해요. 모두의 영웅 캐롤 댄버스의 축제날. 캐롤을 직접 보기 위해 공군 기념관에 모인 사람들. 그중에 두 사람, 현지 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 신문부 학생들이 등장합니다. 내노라할 저널리스트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질문권을 따낸 두 아이들. 지금 그 시각 대기권 바깥에서 외계군대들을 처부수고 있는 캐롤에게 대체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A)아이들의 인터뷰 B)캡틴마블의 활약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왔다리 갔다리 교차되는 간단한 이슈였어요.
전반적으로 무난했어요. "이게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왜 니들끼리만 쑥떡거려" 처럼 쌩뚱맞다고 느껴지는 부분 전혀 없이, 평탄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라는 게 오히려 입문서로써는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해요. 배경지식이 전무하더라도 읽기 쉬웠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작화도 정말 안정되고 멋있었어요! 온갖 작붕이 가득한 아메코믹의 세계에 첫발을 들인 입문자분들이 놀라 도망가지 않도록, 본디 입문서란 보기에 참하고 아리따워야 하는 법이지요. 뭐니뭐니해도 일단 그림이 예쁘고 잘생기면 호감지수 쁘라스점수 먹고 들어간다는 건 누구라도 공감할 거예요. 온몸으로 강함을 내뿜는 캐롤을 멋지게 그려준 펜슬러 시몬 본판티노(Simone Buonfantino)에게 쌍따봉 전해드립니다. (특: 여성 펜슬러입니다!)
입문자의 눈으로 이 책을 봤을 때 가장 좋았던 부분은 아주 섬세한 필체로 캐롤 댄버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해주고 있다는 거였어요. 제가 요즘에 1970년대에 나온 클래식 아담 워록 코믹스를 읽고 있는데요 (웃픈얼굴) 여기서는 뭔가 독자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할 것 같다? 그러면 부리나케 뛰쳐나와서 학습만화처럼 "이봐 친구들 타노스가 누군지 모른다고? 내가 설명해주지!" 라고 직접적으로 정보들을 퍼버벅 때려넣어줍니다. 친절하긴 친절한데... 좀 부담스럽잖아요. 수업시간도 아닌데 달달 외워야될 거 같고.
대신 <캡틴 마블: 더 용감하게, 더 강인하게>는 조금 더 부드럽고 완곡하게, 직접 설명(telling)해주기보다는 상황을 통해 보여(showing)줍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캐롤이 외계군대와 맞서싸우는 모습을 통해서 말이에요.
아이들은 고민해요. 선망하는 영웅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다신 없을 기회인데, 어떤 걸 물어보면 좋을까요? 신문 독자들은 캐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요? 1)캐롤은 공군 파일럿이었으니까 군경험에 대한 질문을 해볼까요? 캐롤은 <스타워즈>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진 바, 분명 한 솔로를 좋아했을 거예요. 아니야, 그보다는 차라리 2)슈퍼히어로로서의 생활에 대해 물어보는건 어때요. 지금 지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따끈따끈 핫이슈니까 다들 읽고 싶어할 거예요.
한편 지구 방어선의 최전방에서 외계군대의 침공을 막아서는 캐롤. 혈혈단신으로 당당하게 수십의 함선을 맨손으로 때려부수는 모습이 너무 멋지죠! 여기서 우리는 3)캐롤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걸 곧바로 직감할 수 있어요. 캐롤의 독백을 통해서 무려 외계인을 때려잡고 있는 도중에 4)약속에 늦었다고 투덜투덜거리는 인간적인 귀여움도 느낄 수 있었구요.(후후)
그뿐만이 아니에요. 복잡하고 어려워보이는 과학 문제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느낀다는 5)개인적인 약점도 보여줘요. 토니 스타크 같은 똑똑이는 아니라는 거. 무식하게 힘으로 해결하려다가 외계무기가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르니까, 나 대신 똑똑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알파 플라이트 대원들을 호출합니다. 이로써 6)알파 플라이트라는 수호대를 이끄는 팀리더라는 것도 알 수 있었죠!
1. 캐롤 댄버스는 공군 파일럿이다.
2. 캡틴 마블은 슈퍼히어로다.
3. 캡틴 마블은 엄청나게 강하다!
4. 캐롤 댄버스는 엄청나게 귀엽다!
5. 캡틴 마블은 과학이 강점은 아니다.
6. 캡틴 마블은 알파 플라이트의 팀리더이다.
이런 식으로 <캡틴 마블: 더 용감하게, 더 강인하게>는 독자인 제가 부담스럽지 않은 방향으로, 가랑비에 옷 젖듯이, 멀게만 느껴졌던 캐롤 댄버스라는 캐릭터를 좀더 가깝게 만들어주고 있어요. 입문자 친화적인 책이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죠?
책의 마지막, 아이들이 고민 끝에 내놓은 질문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어린 나 자신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요?" 였어요. 아이들이 캐롤에게 던지는 질문(The right question)을 고르는 과정이 제법 인상적입니다. 학교 신문에 캐롤 댄버스라는 인물에 대해 소개하는 기사(profile piece)를 내기로 했는데, 군인이고 슈퍼히어로인 사람을 도대체 청소년 입장에서 어떻게 요약할지 갈피를 못잡겠단 말이죠. 이 모든게 막막하고 부담스럽기만 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겁니다. 막막하고 부담스럽다는 그 감정, 한 치 앞날을 알 수 없는 기분,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느끼는 그것은 고등학생 또래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고민이라는 걸 깨달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캡틴 마블에게 묻는 질문으로 그걸 선택했을 거예요. 흔하고 평범한 질문일 수는 있지만,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와요. "우리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 맥락이니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해주는 캐롤의 말은, 지금 이 순간 이 코믹스를 읽고 있을 또래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질 거고 말이에요. 흐뭇합니다 정말.
한편으로 이 페이지가 작가 본인이 느낀 중압감을 표현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코믹스 작가라는 일은 기본적으로 프리랜서니까, 회사에서 하우저에게 일감을 의뢰하는 걸로 시작했겠죠? "안녕하세요 하우저 씨, 잘 지내셨어요? 하핫,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캡틴 마블' 영화가 개봉하잖아요. 개봉철에 맞춰서 코믹스에 낯선 어린이들을 위해 캐롤 댄버스라는 캐릭터를 소개해주는 단편을 기획 중인데, 해보실래요?" 이런 전화통화를 받고서 집필을 시작했으리라 상상해보는데요. 하~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 이거예요. 공군 파일럿이자 슈퍼히어로이며 수십년의 역사를 지닌 여성을 어떻게 단 20페이지 안에 완벽하게 요약해볼 수 있을까요. 작가 개인이 느낀 고민들을 익명의 아이들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코믹스를 닫는 마지막 페이지는 정말 완벽 그 자체예요. 캐롤은 아이들의 질문에 "어렸을 때의 나 자신을 만나더라도 그 어떤 조언도 해주지 않겠다"라고 대답해요. 지난 날을 돌이켜보며 아픔도 기쁨도 모두 현재 나라는 사람을 만들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포용하는 거죠. 생각해보면 슈퍼히어로라는 게 거창한 게 없는 거 같아요.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렇게 코믹스를 읽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주고 우러러볼 수 있는 롤모델이 되어주잖아요. 지금의 선택에 불안해하지말고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가라는 메시지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캡틴 마블> 영화가 개봉할 즈음에, 그리고 위의 코믹스 리뷰를 쓴 이후에 웹매거진 ize의 청탁을 받아 쓴 기사입니다. 수십 년 코믹스 역사에서 캐롤이 겪은 수모와 역경을 코믹스 변천사를 통해 엮어 기술했어요.
ize의 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캐롤 댄버스는 마의 80년대 90년대에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됐었냐?"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굴려졌습니다. 메이저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등장하는 게 낫겠냐, 아니면 마이너에서 소리소문없이 잊혀져서 묻히는 게 낫겠냐 생각하면 뭐가 더 나은지 모르겠을 정도로 말이에요. 캐릭터에게 이런 험난한 역사가 있다는 걸 알고 난 뒤에 <캡틴 마블: 더 용감하게, 더 강인하게>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보면 엄청난 감동이 몰려와요.
비록 80년대, 90년대 여성혐오적 시각으로 끔찍하게 굴려졌던 캐롤 댄버스이지만 그녀는 그런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아요. 그저 '그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나 자신이 있을 수 있는 법'이라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너무 감동적인 거 있죠.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모든 모습들을 나 자신으로 인정하고 긍정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낮에 자기부정을 밥먹듯이 하던 제게 큰 귀감이 되어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제는 미룰 수 없다, 캐롤 댄버스 덕질! 캡틴 마블 코믹스도 열심히 읽어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