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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연 Aug 16. 2019

당신의 지갑을 털어갈 도둑고양이 블랙캣

블랙캣 (2019) #1~3 리뷰

블랙캣 온고잉 솔로타이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캣에게 40년만에 주어진 첫번째 솔타인데 리뷰를 안 남길 수야 없잖아요. 그런데 글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한참 고민했어요.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라고요. 뭐랄까, 참으로... 밍밍하더입니다.


블랙캣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해본다면 뭐라고 요약을 해볼까요. 본명 펠리시아 하디는 섹시 팜므파탈 계열의 캐릭터로, 좀도둑(cat-burgler)을 업으로 삼으며 선악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스릴만점 줄타기를 즐기는 사람이에요. 짝 달라붙는 타이즈로 강조되는 매력적인 몸매와 풍성한 은발로 뭇남성들을 현혹하며 그것을 약점잡아 마음대로 갖고 놀지요. 남자주인공 피터 파커와도 오랫동안 인연이 있어서 실제로 연인관계로 발전했던 적도 있어요.


블랙캣은 그웬 스테이시, 메리 제인 왓슨과 더불어 피터 파커의 대표적인 러브 인터레스트로 거론되는 인물이에요. 그들이 연인이었던 것은 1980년대에 몇 년 뿐이었는데도, 지금까지 그들의 관계성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답니다. (피터가 메리제인과 결혼한 게 1987년의 일이니까, 거미캣이 사귄 기간은 대략 4~5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어요. 물론 작중 기간이 아닌 현실 기간.) 팬층이 이만큼 두둑이 형성돼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의 온고잉 단독주인공 작품이 40년 만에 나왔다는 게 다소 이상할 정도예요. '이제야?' '슬슬 그럴 때도 됐지' 이런 기분.

제가 캣에게서 매력을 느꼈던 건 무엇보다 자유분방함에 있는 거 같아요. 펠리시아는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여자에게는, 특히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에게는 이러저러 제약이 많잖아요. 앉을 때는 조신하게 다리를 모아 앉아야 하고,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거나 경망되게 행동해선 안 되고(소위 '나대선' 안 되고) 등등 한도 끝도 없어요. "너는 여자애가 돼서 왜 그렇게 구냐" 같은 말이 아직도 나오는 세상인데요 뭐. 캣은 이런 시시콜콜한 규제에 단호하게 NO라고 외치며 엉덩이를 뻥 걷어찹니다. 우리 고양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거든요! 무언가가 필요해지면 그는 상대가 누구든지 손쉽게 훔칩니다. 온 세상이 그의 것이나 다름 없어요.


도둑질은 분명 나쁜 일이지만 캣에겐 나름의 규율이 있어서 어느 일정 선을 넘지 않지요. 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에게서 값진 물건을 훔치는 건 괜찮다는 주의예요. 눈 앞에 민간인이 위기에 처하면 반사적으로 뛰어들어 구조활동에 나서구요. 캣은 스스로 "나는 히어로도 빌런도 아닌 도둑이다." 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수지에만 맞는다면야 히어로 빌런 가리지 않고 잘 어울립니다. 그만큼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이에요.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요. 캣이 가는 곳마다 사고가 뒤따르긴 하지만 그걸 유연하게 처리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에요. 정말 멋지죠.

거기다가 섹시하기도 하잖아요. 야한 거 좋아.

성적대상화의 표본, J 스콧 캠벨 (UGH) 리터럴리 코르셋을 입혀놨습니다. 내장이 없어진 펠리시아.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아이캔디로 성적대상화되는 건 싫어요. (-_-)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야함'과 무분별한 성적대상화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믿어요. 요컨대 밴다이어그램에서 '야하지 않음'과 '야함'이 겹치는 그 좁은 안전지역에 들어가려면 굉장히 노력을 해야겠지요 작가들아?

잠깐 들은 생각이지만, 매력적인 외모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섹시 컨셉의 캐릭터는 뭐랄까, 어떻게 보면 외모중심주의에 찌든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에는 이런 '꽃뱀'(UGH)류의 캐릭터가 "예쁜 여성, 남성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는 여성, 주체적인 여성=나쁘다"라고 납작하게 단정지어버리는 몹쓸 전형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요. 달리 보면 성격, 영혼, 사람의 됨됨이라는 무형적 가치를 도외시하고 겉으로 보이는 외적 특성, 물질세계에 집착하는 남성들을 징벌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볍고도 갑작스럽게 던져본 하나의 해석일 뿐이에요.

UGHHHHH 레귤러 커버가 캠벨이야 제발 좀 생각 좀 하고 살아라

그리하여 읽었답니다. 현재 이슈 3편까지 나온 상황. 전부 읽어보았어요. 글의 첫머리에 적어놓았듯이, 1차적인 감상은, 음, 밍밍했어요. 제가 워낙 좋아하는 캐릭터라서, 너무 기대를 걸어서 그랬을까요? 뭔가 삼삼하고 아쉬운 기분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전형적인 하이스트(Heist) 장르로 시작해요. 펠리시아는 최근 5년 동안 완전히 빌런으로 돌아서서 뒷골목을 주름잡는 '퀸핀'으로 지내다가 겨우 올해 마음을 고쳐먹고 본래의 Status로 복귀한 참이에요. 위에 서술했듯 블랙캣의 가장 큰 캐릭터성은 '도둑'이니까 어떻게보면 당연하다 싶은 전개이기도 해요. 하지만 이야기가 재미있었느냐는 별개잖아요. 스토리 자체가 좀 약했어요. Blend하고 Plain했다.


이슈 1편은 으레 그렇듯이 "앞으로 이런 식으로 가보려고 해~" 라고 키플레이어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갖는데, 각각이 그다지 인상적이지가 않습니다.


1. 오데사 드레이크: 까마득한 전통을 자랑하는 '도둑 조합'의 수장. 마블 유니버스의 모든 도둑들은 반드시 훔친 값의 일부를 조합에게 헌금해야 한다는 설정입니다.
2. 보리스 콥스: 매드 사이언티스트
3. 브루노 그레인저: 힘 쓰는 덩치
4. 블랙 폭스: 펠리시아의 아버지와 펠리시아에게 도둑질을 가르친 스승
5. 소니 오캄포: 전직 범죄자 출신의 보안업체 부장

1번을 제외하고 한 줄, 심하게는 한 단어로 요약될 정도면 상당히 평면적이고 지루한 캐릭터라는 뜻 아니겠어요. 1번 오데사는 펠리시아랑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갈등을 겪은 탓에 앞으로 재밌어질 수도 있겠다고 아이디어를 던져주긴 하지만, 그게 다예요. '도둑 조합'은 딱 봐도 나중을 위해 아껴둘 심산이에요. 오데사는 약간 미스테리하게 파워 게임을 하면서 이러저러 장기말을 굴릴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니까 다양한 캐릭터를 소개하기도 좋을 거구요. 모름지기 간보기 맛배기 스파링을 몇 번 해줘야 보스전에 들어가는 맛이 있지요. 나머지는 MEH입니다.


특히 4번 스승 캐릭터는 정말이지 "알게 뭐냐" 싶을 정도로 하품 나오는 캐릭터. 클래식한 본드 계열의 '노신사' 범죄자일 뿐인데요. 특별할 게 하나도 없어요. 이런 캐릭터는 비단 코믹스만 아니라 온갖 미디어 매체에서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에 독자가 놀랄 일이 없다입니다. 정말 놀래켜주려면 꽉 막힌 코믹스에서 자주 보기 어려운 성지향성/성정체성을 갖고 있거나--Make him gay/trans you cowards--아주 아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캣을 배신하거나 죽음을 맞거나. 선택지는 이 셋뿐인 것 같아요. 블랙캣 #1 이슈에 4.99달러 값을 매겨놓고 막상 본편은 레귤러 20페이지에 불과하고, 이런 재미없는 스승의 단편 따위가 8페이지나 차지할 때에 실망감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해도해도 너무하지.

2번과 3번은 '머리 쓰는 애'와 '힘 쓰는 애'로 양분되는 전형적인 캐릭터들. 도대체 골라도 꼭 이런 평범한 녀석들을 골라왔냐 싶었는데, 찾아보니 80년대에 아주 잠깐 단역으로 나왔던 도둑 캐릭터더군요. (블랙 폭스도 마찬가지.) 그냥 새로 만들지 뭐하러 있는지도 모를 잔챙이를 데려왔느냐 이거예요. 대체 무슨 얘기를 할 게 있다는 건지 의문인 지점. 각각 개성이 많이 부족합니다. 캣의 크루들이 나누는 다이얼로그가 그다지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이런 탓.


5번은 일요일 아침 만화영화에서 나오던 '캣츠 앤 마우스' 맴맴 도둑잡기 구조를 위한 캐릭터라는 게 노골적으로 보입니다. 보안업체의 부장으로 캣에게 눈뜨고 코베인 뒤에 분통을 터트리는 모습이 그래요. 톰은 제리를 잡을 기회가 무한하게 주어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단 한 번의 실수로 즉각 모가지 짤린 오캄포를 오데사가 남줍합니다. 오데사는 오캄포를 이용해 '도둑 조합'의 골치덩이인 블랙캣을 잡아보려는 속셈이에요. I gotta ask, 왜죠? 그 대단한 '도둑 조합'에 그렇게 인재가 없나요? 소니 오캄포는 그냥 '주인공에게 된통 당하는 바보' 정도로 소개됐는데 대체 뭐가 잘나서 캣의 대항마로 등용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THE ANSWER IS WOMEN

무엇보다 아쉬운 건, 이 모든 캐릭터 조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너무나도 쉽고 간단한 해결법이 있다는 거예요. 바로 이들을 여성으로 소개하는 방법입니다. 정말이에요. 2번부터 5번까지 모든 남자를 여자로만 바꾸어도 상당히 흥미로워져요. 2번과 3번 '머리'와 '덩치'는 어떤 이유로 범죄에 발을 들였으며 어째서 같은 여성인 캣에게 절대충성을 하는 걸까 궁금해지죠! 4번, 고전 흑백 영화에서 걸어나온듯한 클래시한 정장 차림의 프로페셔널 할머니 도둑! UGH!! 이미저리를 생각해봐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요컨대 여성이 주연으로 하이스트 장르에 등장하는 건 전형적이지 않다는 거죠.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의 후속작인 <오션스 에이트>를 생각해보세요. 개봉 당시에 여성들이 한데 모여 '한탕 크게' 도둑질을 하는 이야기는 흔하지 않다는 논조로 커뮤니티에서 '영업'이 돌았던 게 기억나요. 개인적으로도 극장에서 정말 재밌게 관람했구요. 여성 범죄자가 주연이라는 점에서는 <오렌지 이즈 뉴 블랙>를 떠올려볼 수 있겠죠. <오뉴블> 캐릭터들이 남자였다면 많은 부분이 다소 뻔했을 텐데, 여자였으니까 효과적으로 먹힌 부분이 분명히 있거든요! 5번을 여성캐릭터로 치환한다면 <킬링 이브>와 같이 체제 번복적인 재미를 갖게 되겠죠?

Easy way it is.

마블코믹스 편집부가 이렇게 간단한 해결책을 눈앞에 두고도 기어이 쉬운 길을 선택했다는 게 실망스러워요. "아니야, 우리는 안전하게 가겠어. 맨날 나왔던 얘기를 그대로 반복해야지. 괜히 남성독자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니 뭐니 그런 분란을 일으키지 말자고. 남성독자들은 아주 예민하고 상처를 잘 받으니까 우리가 보듬어줘야지. 안 그래도 여성캐릭터 솔타인데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냐고 악의적인 해석까지 하게 되거든요. 부글부글부글...

뒷골목 조직범죄계의 기이한 성비, 남녀 간 기울어진 운동장을 문제 삼는 여성 빌런 비틀

그도 그럴게, <블랙캣>은 스파이더맨 부서에서 내놓은 책이에요. 헌데 같은 부서에서 내놓은 책에서!! 겨우 저번달에!!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신간에서 이런 장면이 나왔단 말이에요!! 이말은 즉, 얘네들이 문제점을 알고도 이래놨다는 게 확실하다는 거 아니겠어요? 야, 진짜 게을러 빠진 녀석들아. 당장 펠리시아를 불러와서 엉덩이를 뽝 차버려야 해요.

작화면에서 보면... 처음에는 굉장히 unimpressed했어요. 이야기가 지루하다보니 작화도 좀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모래처럼 꺼끌꺼끌하고 거친 잉크선에 에어브러쉬로 무심하게 칠한 듯한 컬러링은 그다지 일반적이진 않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리뷰를 위해 두 번 세 번 다시 읽어보니까 문제는 그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냥... 단순히 글을 못 쓰니까 페이지가 조금 비어보이는 것 뿐이더라구요. 별 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으니까요. (faceless 닌자들이랑 추격전을 벌이는 것따위 일도 아니죠. FEH!) 찬찬히 음미해보니 장점을 찾을 수 있었어요. 

특히 레터링이 정말 환상적입니다. 페이지가 너무 비었다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요. 눈이 가는대로 흐름 따라 편안하게 구성되어있어서 좋았어요. MM-MWHA!

스토리작가를 너무 가루가 되도록 깠나 싶어서 뒤늦게 좋은 말도 첨언해보자면, 3편에 와서 "아 드디어 제대로 된 얘기를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1편 2편까지는 느릿느릿 인트로를 밟다가 3편에서야 드디어 기상천외하고 재밌는 액션이 펼쳐지더라구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블랙캣의 중요한 특색인 '불운(Bad luck)' 능력을 통해서라는 것도 좋았어요. "마법은 현실의 개연성 필드를 고의적으로 조작하는 일이다"라는 사이언티스트의 말에 캣이 "개연성은 '운'이라는 말을 그럴듯하게 늘여쓴 것뿐이야!!"라며 크게 깨달음을 얻고 의기양양 마법사 빌런을 털어버리는데, 아유 어찌나 속시원하던지요~ 개연성 조작의 정확성을 떨어트리는 불운을 걸어버리는 펠리시아. 신선하고 재밌는 접근이었어요.

UGHHHHHHHH

캣이 섹시 계열이다보니 솔타 발표가 났을 때 제일 걱정했던 건 성적대상화 문제였는데, 클래식 코스튬 때문에 젖가슴을 조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없었다는 게 솔직한 평이에요. 그림작가 스타일이 검은 쫄쫄이를 페인트로 확 부어버리는 거라서 몸매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없다보니 좀 덜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건 정말 좋았어요. 클래식 코스튬이야 개선점은 분명히 있겠지만 이 자체로 몹시 매력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겠고, 또 맨 첫등장 때처럼 개목줄을 하고 있거나 90년대 때처럼 가슴부터 배꼽까지 계곡처럼 파인 에바쎄바 노출이라거나 등등을 생각해보면 이정도면 양반이지 싶어요. 이건 제가 업계 관례에 무뎌진 탓이겠지요. 반성.


제가 이 시리즈의 출발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 작가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처럼 아주 천천히 접근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니까요.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계속해서 두고 봐야죠. 이대로 궤도를 타서 좋은 이야기가 나와줬으면 좋겠어요.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3편 정도만 하더라도 평타로 쳐줄 용의가 있는데 말이에요. 내가 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인데. 다만 블랙캣을 범죄계의 홍일점으로만 묘사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비틀의 말을 새겨들으라고 편집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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